너를 사랑한 슬픔 너를 사랑한 기쁨 2 지은이: 경요 출판사: 문일 24 구 원장의 차는 연평북로에서 이름난 어느 술집 입구에 멈춰 섰다. 휘황찬란한 술집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 종업원들이 급히 뛰어와 차 문을 열었다. 구 원장은 여전히 담배를 손에 든 채 머리를 앞좌석 쪽으로 내밀며 장씨에게 말했다. "차는 여기 세워놓고, 장씨는 영화라도 한 편 보 고 나서 열한 시 반에 나를 데리러 와요." "예, 원장님." 머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대답한 장씨는 잠시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구 원장이 차에서 내리자 종업원은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그를 안내했다. "곽 사장님은 205호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요." 구 원장은 웃으면서 종업원의 어깨를 툭 쳤다. 게임하는 소리, 노래하거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그는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에는 고급스런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분수대가 설 치되어 있었다. 오색 불빛이 내리비치는 분수대 꼭대기에서 원형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무지개를 만들었고, 작은 진주 알처럼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은 갖가지 색깔을 내며 분위기를 자아냈다. 객실은 이 층에 있었다. 고급 양탄자가 깔려 있는 객실 가장자리엔 고급 소파가 놓여 있었고, 방의 중심부에 매달 린 큰 샹들리에에서는 색색깔의 전구가 구슬발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객실과 객실 사이의 복도로 예쁘 게 차려입은 호스티스들이 왔다갔다했다. 구 원장을 205호 앞까지 안내한 종업원이 노크를 한 후 문을 열었다. "구 원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는 한 바탕 요란한 박수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 가 들렸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벌주부터 드셔야 겠는데요." 구 원장은 웃으면서 원탁을 둘러싸고 있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5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곽 사장이 원탁 중앙에 앉았고 건성 화학공장의 임용호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방금 홍콩에서 관광차 고국을 방문한 화교 사장을 제외하곤 구 원장 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리 시중을 들고 있던 7, 8명의 호스티스가 구 원장에게 인사를 했다.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늦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구 원장은 말을 마치고 먼저 잔을 들어 건배했다. 모두가 잔을 들었고,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로 잠시 시끌벅적해졌다. 구 원장은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이 마를 찌푸렸다. "위스키였어요? 정말 독하군!" "멀리서 오신 귀빈께 좋은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여기 선 좋은 술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곽 사장은 한 모금 마시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구 원장님, 먼 저 안주부터 들어요. 흥이 나기도 전에 취하시면 어쩔려고요." 머리를 쪽지어 올린 호스티스가 젓가락 으로 닭고기를 한 점 집어다가 구 원장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구 원장은 고기를 받아먹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수지야, 며칠 안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그 호스티스는 유혹적인 미소를 지 어 보이며 더욱 아양을 떨었다. "구 원장님도 안 보는 사이에 많이 젊어지신 것 같아요." "내가 젊어 졌다구?" 구 원장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 딸이 너보다 더 클걸!" 곽 사장 옆의 호스티스는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은 곽 사장이 구 원장에게 말을 걸었다. "구 원장, 어쩌다 그렇게 늦었습니까?" "참, 곽 사장도." 구 원장은 그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아시면서 자꾸 사람 곤란하게 만들 겁니까?" "그런가요." 임용호가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원장님 부인께서 돌 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어이구, 이거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만, 꼭 집사람 때문만은 아 닙니다. 사실 오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 퇴근해서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오느라 좀 늦어졌어요." "자, 술이나 듭시다." 곽 사장이 잔을 들며 모두에게 권했다. 요리상이 새로 차려졌고, 호스티스들은 자 기 손님에게 요리를 집어넣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어서 한 손님이 호스티스와 가위바위보 게임을 시작했다. 구 원장을 기회를 엿보아 곽 사장에게 말했다. "곽 사장, 오늘 모신 손님들은 내가 먼저 초 대하려고 했는데 결국엔 곽 사장한테 선수를 뺏겼군요." "아, 괜찮아요.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모처럼 홍 사장이 홍콩에서 돌아오셨다길래 우리 모두 친목을 도모하는 뜻에서 자리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구 원장은 이미 전화로 홍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는 홍콩의 화교가 건설한 화학공장의 책임자 로 관광차 들른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관광 목적 외에도 고국에 투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는 것이었다. 곽 사장은 그들이 대북에 지사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발빠르게 알아내고는 공장을 정비하 고 설비까지 확충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에 홍 사장에게 공장을 참관시켰고 저녁엔 환영식까지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앞 뒤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구 원장은 손님들에게 한 가지 공언을 했다. "그러면 내 일 저녁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홍 사장님을 비롯해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을 초대하겠습니다." 홍 사장은 몇 번 사양했으나 결국에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구 원장은 내친 김에 그 자리에서 초대장 을 직접 써서 모두에게 나눠주고 아예 술좌석까지 예약을 끝냈다. 곽 사장은 구 원장의 깊은 배려에 속 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군요!" "천만에요!" 구 원장은 곽 사장과 잔을 부딪쳤다. 곽 사 장은 잔을 내려놓으며 자기 옆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고 있던 호스티스를 구 원장 쪽으로 보냈다. 구 원장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에 곽 사장 옆에 있던 호스티스가 바뀐 것을 눈치챈 것이다. 짧게 흘러내린 곱슬머리에 화장을 엷게 한 얼굴이 무척이나 청아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구 원장 옆 으로 다가온 그녀는 사로잡을 듯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구 원장님!" 구 원장은 저도 모르게 몸 이 짜릿해짐을 느꼈다. "유리, 언제 들어왔어? 내가 왜 진작 유리를 못 봤을까?" "좀 전에요. 선생님께 서 한창 손님들에게 초대장을 나눠주고 있을 때 들어왔어요." 그녀가 술을 한 잔 권하며 덧붙였다. "요즘도 선생님 병원은 많이 바쁘시죠?" "유리." 구 원장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곽 사장이 너 때문 에 속을 많이 앓는 모양인데, 좀더 그분에게 잘 대해 드려라." 유리는 처량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어 제 저녁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구 원장은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서 곽 사장을 쳐다보았다. "어제 곽 사장은 정신없이 바쁘지 않았습니까? 언제 유리를 만났지요?" 곽 사장은 유리를 향해 기분 좋은 미 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저녁에 만났다지 않습니까? 나라고 해서 밤늦게까지 공장에 남아 일 만 할 수는 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구 원장은 한 가지 비유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에 어떤 장군이 남긴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평생의 제일 큰 관심사 중 하나는 강산이요, 또 한 가지는 미인이라.' 이 구절은 꼭 곽 사장을 위한 구절 같은데요?" 곽 사장은 술잔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가 구 원장에게 말했다. "좋은 시로군요. 술맛이 절로 나는데요." "그건 그렇고, 내가 그 사람을 어떻 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곽 사장은 구 원장이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천광열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구 원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일단 황철규에게 위임했어요. 담당의로서 신중 하게 판단하라고 했죠. 격리시킬 것인가 아닌가는 그가 결정할 겁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질 것 같습 니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반드시 확실한 해결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거죠. 더 이상 질질 끌면 일만 커질 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던 유리는 곽 사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 다. 몹시 겁먹은 표정이었다. "저는 두려워요!" "뭐가 두려워?" 곽 사장은 웃으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설마 그가 도망이라도 나와 널 해칠까 봐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라." "그 문제는 술자리 가 끝난 후에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구 원장은 곽 사장을 일깨우듯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손님들이 있잖소." "그러죠!" 이때 마침 2명의 젊은 아가씨가 들어왔다. 진한 화장에 꽃무늬가 그려진 연주복 차림의 아가씨들은 20세 남짓 되어 보였다. 한 명은 손에 아코니언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비파를 들었다. 그녀들은 들어서자마자 곧 손님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곽 사장이 그들에게 노래를 시켰다. "홍 사장님은 홍콩에서 오신 귀한 손님이니 너희들이 가장 자신 있는 노래를 한번 불러 보려무 나." 아가씨들은 홍사장을 향해 무릎을 약간 구부리며 미소 지어 보이고는 황배조 중창을 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곧이어 유행가 두 곡을 더 불렀다. 모인 사람들 주의 누군가가 노래를 따 라 부르며 춤을 추는 바람에 온 방안에는 웃음소리가 넘쳤다. 유행가가 끝나자 또 다른 여성이 들어왔 다. 그녀는 앉아서 해금을 연주했다. 그리고 나서 한 호스티스가 소린상이라는 노래를 반주에 맞춰 열창 했다. 한 호스티스가 나가면 새로운 아가씨가 들어왔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는 사이에 술병과 음료 수병이 방 안의 모서리에 가득 쌓였고, 탁자 위에는 여전히 가득 채워진 술잔이 넘쳤다. 사람들은 모두 붉어진 얼굴로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술잔이며 쟁반 따위가 이리저리 어질러지 기 시작했다. 호스티스 아가씨들도 모습이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아가씨는 술을 못 이겨 손님 품안에 쓰 러져 있었고, 어떤 아가씨는 손님의 치근덕거림을 피하려는 듯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유독 곽 사장과 유리만 다정하게 앉아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미 손님접대에는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술자리가 파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 원장은 아직 남아 있었 고 곽 사장과 유리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세 사람은 천광열의 문제를 의논했다. 그러나 생각이 제각기 달랐다. 유리는 크게 겁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천광열이 나타나 해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곽 사 장은 무엇보다도 가정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천광열이 아무 때고 집에 쳐들어올 것만 같았 다. 와서 시끄럽게 군다면 천광열 자신은 기껏해야 감옥에 가겠지만 자기의 가정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 다. 또한 유리와의 관계가 왜곡되어 밖으로 알려지면 그의 사업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구 원장은 그들 두 사람과는 달랐다. 결국 그도 그들과 같은 편에 설 수밖에 없지만 마음속으로까지 그 런 건 아니었다. 그는 천광열이 정신병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격리 병실에 가둬야 할 정도의 중증 환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차를 부수고 사람을 때리는 것은 일종의 궁여지책이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에게로 분노를 발산시켰던 것이다. 최근의 반 응을 보면 그는 분노를 오로지 곽 사장에게로 집중시켰다. 개인적인 입장만 아니라면 곽 사장 기습사건 은 원장이 책임을 져야 했다. 천광열은 그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곽 사장을 두둔하기 위해 이 무고한 사람을 병원에 가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천광열은 확실히 정신분열증 세가 있었다. 적어도 구 원장이 아는 일의 진상은 그랬다. 곽 사장과 유리가 알게 된 건 3년 전이었다. 당시 작은 술집에서 술시중을 들고 있던 그녀의 본명은 진희였다. 그녀에겐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어머 니와 막 중학교에 들어간 여동생, 소아마비를 앓는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건달이었는데 살인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십대 소녀인 진희가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되었다. 처음 에 곽 사장은 장난 삼아 그녀를 수양딸로 삼으려 했으나 얼마 안 가 그녀의 슬픈 사연에 연민을 느꼈 다. 그녀 역시 술을 따르며 웃음을 팔아야 하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곽 사장은 그녀의 몸값으로 큰돈 을 술집에 지불했고, 공장에 데려와 일을 시켰다. 그녀는 매우 총명한 여자였다. 공장생활 틈틈이 중학 교를 다니면서 기술을 익혔다. 매우 성실하고 겸손한 그녀의 성격은 반장을 비롯한 모든 공장 사람들에 게 호감을 얻었다. 그러던 중 천광열이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곽 사장이 그녀를 특별히 아끼고 있 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무작정 진희를 쫓아다녔지만 그녀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탓에 천광열을 그럭저럭 적당히 상대해 주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는 후일이면 그와 함께 영화도 보러 갔고 여기저기 구경을 다닌 적도 몇 번 있었다. 천광열은 그럴수록 그녀가 자기 를 좋아하는 줄 알고 더욱 열심히 쫓아다녔다. 하루는 진희의 남동생이 부주의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치료비를 지불할 돈이 없었다. 혼자 집에서 울고 있는데 하필 그때 천광 열이 찾아왔다. 그는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봤자 별 도움 도 되지 못할뿐더러 설령 그에게 도울 능력이 있더라도 받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천광열은 실망감을 이기지 못한 채 자기 혼자 술을 마셨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자리 에서 같은 공장에서 일하자 해고된 노동자를 만난 게 불운의 시작이었다. 그는 곽 사장이 진희를 임신 시켰다며 천광열을 충동질했다. 격분한 천광열은 술에 잔뜩 취한 채 곽 사장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모두들 곽 사장이 진희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임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 라 병원 검사결과에 의하면 그녀는 아직 처녀성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천광열의 처지는 매우 불리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곽 사장은 그녀 집의 가정형편이 그 정도인 줄은 몰랐었다. 진희는 그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천광열은 무고와 명예 훼손에 폭행죄까지 추가되어 형을 선고받았다. 진희는 그 일이 있은 뒤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장 에서 일을 했다. 곽 사장은 사람을 시켜 그녀의 어린 남동생을 치료하도록 도왔다. 그녀에게도 다른 곳 에 일자리를 찾아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연락이 끊겨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한번은 곽 사 장이 구 원장과 함께 술집에 들렀는데, 놀랍게도 진희가 그 집에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뜻밖의 장소 에서 마주친 세 사람은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놀란 그녀가 술도 따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뛰쳐나가 려는 것을 곽 사장이 잡고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 동안의 사연을 늘어놓았다. 남동생이 병원에 있을 때 엎친 데 엎친 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여동생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학비가 많이 필요했다. 그녀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 일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큰 술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스티스였다. 이곳에서도 유리라는 과거의 예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욱 원숙한 아름다움으로 취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곽 사장도 그런 단골손님 중의 하나였 다. 구 원장은 이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곽 사장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미 정신이상 증세로부터 상당히 회복된 이상 천광열을 병원에 무작정 가둬놓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보통 일반병동도 아닌 격리병동에 죄인처럼 갇혀 있는 신 세였다. 진실을 알게 되면 병원의 의사들도 항의할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그것은 의사의 도덕 성과 관련된 일이므로 구 원장으로선 차마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들은 한 가지 결론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 또한 곽 사장을 경제적 지원자로서나 천광열로부터의 보호자로서 결코 포기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설사 천광열이 퇴원한다. 하더라도 그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살기 를 바랐다. 그래야만 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11 시 30분쯤 구 원장은 자가용이 아래층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먼저 떠났다. 뒤이어 곽 사장도 유리 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술집을 나섰다. 그녀는 오늘따라 마음이 편치 않아 보였다. 어디선가 천광열 이 뛰쳐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곽 사장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24 같은 날 저녁, 경빈과 영채 커플, 그리고 황철규와 영채의 친구 유미리, 이 네 사람은 중앙주점 에서 식사를 한 후 그곳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보았다. 철규는 이런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렸다. 그는 종종 경쾌한 말투와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그는 여자와 상대할 때 하나의 원 칙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술집 여자나 무희들에게는 절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반대로 귀부 인이나 혹은 부잣집 아가씨들에게는 조금씩 경솔하게 대했다. 그의 이런 행동에는 나름대로 이론을 갖 추고 있었다. 즉, 호스티스나 무희들의 대부분은 스스로를 낮추는 경향이 있어 자신을 경시하는 것에 익 숙해져 있기 때문에 일단 한번 존중을 받으면 내심으로 무척 감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와는 반 대로 주로 신사들을 대하는 귀부인니나 아가씨들은 항상 존중을 박기 때문에 일단 무시하고 소홀히 대 하면 업신여긴다는 생각보다는 낭만적이고 친근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인 것처럼 이 또한 시기와 장소에 따랄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었다. 즉, 운용 의 묘가 필요한 것이다. 네 사람은 원형 무도장의 좌측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무대 위의 공연장 면이 아주 잘 보이는 자리였다. 한껏 마음이 풀린 사람들은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시간은 음 악과 노래와 농담의 떠들썩함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밤 10시쯤, 열기로 들뜬 주점에서 한 차례의 공 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끈한 금발의 아가씨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그녀는 풍만한 육체로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얇게 비치는 옷 사이로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음악의 흐름을 따라 그녀가 몸을 비틀며 긴 장갑을 벗고 커다란 숄을 벗어버리자 분홍색의 브레지어와 삼각팬티만 남았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와 요란한 환호성이 울려왔다. 관중에게 등을 돌 리고 선 여자는 한층 더 요염한 몸짓으로 브레지어 끈을 풀었다. 등짝이 하얗게 노출된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다시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그녀는 몸을 한번 비틀더니 양팔을 높 이 들어올렸다. 손에 브레지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브레지어를 벗어 관중석 쪽으로 던져버 렸다. 풍만한 유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완전히 전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유방은 두 개의 동 전 크기만한 물건이 붙어 있었는데, 겨우 보일까 말까 하는 정도의 끈이 그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계속 몸을 비틀며 관중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간 관중들은 내려올 생각을 않 고 몸을 흔들었으며, 그녀의 가슴 앞에서 파동치고 있는 두개의 끈을 넋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의유 방과 큰 엉덩이가 격렬하게 흔들릴 때마다 모두들 아찔해 했다. 잠시 후 조명은 꺼졌으나 무대의 열기 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또 한차례 사람들의 혼을 빼놓을 준비를 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가습 앞에 있는 두개의 끈에 불을 붙이고는 풍만한 유방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끈 아래쪽으로 불이 점차 두 개의 둥근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하자 우뢰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곧이어 그녀는 흔드는 것을 멈추고 드리워진 끈을 다시 천천히 비틀기 시작했다. 그러자 왼쪽 끈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오른쪽 은 풍만한 동그라미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왼쪽을 동그라미로 만들었다. 마지막 순간 불꽃은 화려하게 타올랐고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공연이 끝났다. 박수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조명은 다시 밝아졌다. 열정에 들뜬 관중들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때 갑자기 무대 왼쪽에 자막이 밝아지며 '담 수 주 선생님 전화'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영채가 그것을 먼저 발견하고 넌지시 경빈에게 말했다. "경빈 씨 전화는 아니겠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는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걸어 자기를 찾을 리 도 없고, 또 자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도 없기에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경빈 씨도 이 런 전화는 별로 반갑지 않죠?" 영채가 물었다. "그렇지. 이런 때 오는 전화는 분명히 좋은 일이 아니 거든." 그러면서도 경빈은 웨이터에게 전화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았다. 역시 그를 찾는 전화였다. "제가 주경빈인데요. 무슨 일로 나를 찾았습니까?" 병원 당직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상대편 목소리는 몹시 급박했다. "주 선생님, 곽 사장님 댁에 긴급한 일이 생겼나 봅니다. 구 원장 댁에 전화를 걸어 물어 보 았더니 대북에 가셨다고 해서, 몇 군데 수소문을 하고..." 경빈은 불현듯 시예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몹시 당황했다. 자살을 시도했던 진송희 생각도 떠올랐다. 그는 몹시 다급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 댁에선 급히 연락만 취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다른 말씀은 전혀 없었는 데, 아마 따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어요." "좋아요, 아무튼 고마워요. 찾느라고 수고했어요." 경빈은 일단 장거리 전화로 곽 사장 댁에 연락을 취해 보았다. 곽 사장 부인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그 녀는 경빈의 목소리를 듣자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님, 시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저 기 찾고 있는 중이지만 오리무중이에요." 일단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아니었기에 그는 애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사모님,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집에선 언제 나갔습니까?" "여섯 시쯤 될 거예요. 식사시간이 돼서 양금이를 이층으로 올려보내려고 했더니 지금 밖에서 산보하고 있다 고 하더군요. 그런데 잠시 후 시예를 찾으러 나갔던 양금이가 집 근처엔 없다며 도로 들어왔지 뭡니까? 그래서 왕씨가 길 입구에 있는 상점에 가서 물어보니 택시를 타고 대북방향으로 갔다는 거예요." "왕씨 는요? 차를 가지고 나갔습니까?" "차를 타고 찾으러 갔는데, 한 시간 전에 대북에서 전화가 왔어요. 시 예가 가 볼 만한 곳은 모두 뒤졌는데 없다고요. 하필 이럴 때 그 애 아빠도 집에 없으니..." "알겠습니 다, 사모님. 제가 곧 찾아보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을 찾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선생 님이라면 시예가 갈 만한 곳을 알 것 같았어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 명히 시예 씨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시간 내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경빈은 전화기를 내려놓자 오히려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만일 그녀가 스스로 차를 몰고 갔다면 차라리 찾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 택시를 타고 나갔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넒은 대북에서 그녀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것은 잔디밭에서 바늘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이미 약속까지 하지 않았는가? 설령 누가 부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당연히 그녀를 찾아 나 섰을 것이다. 자리에 돌아오자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누구 전화예요? 무슨 일인데 이야기 를 그렇게 오래 했어요?"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킨 영채가 두서없이 물었다. 경빈은 잠시 생각한 후 결정을 내렸다. 그는 굳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녀를 찾기 위 해 떼거리로 몰려간다면 소심한 그녀가 당황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나서면 번거롭기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알리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아닌가. 차라리 그들은 안심하고 이곳에서 놀도록 하고 황철규의 배웅을 받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마음 편하게 시예 를 찾아 나설 수 있으니 일단은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경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적당히 둘러대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원에서 온 전환데 일이 생겨서 빨리 가봐야 되겠어요."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하죠? 꼭 이럴 때 병원에 가야만 하나요?" 황철규가 경빈을 대신해서 말했다. "병원에 서는 항상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법입니다." 경빈은 급히 서둘었다.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나는 그만 가볼 테니 세 분은 여기서 좀더 놀도록 해요. 만일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형이 번거롭더라도 두 아가씨를 데려다주고요." "그러지." 철규는 물론 대환영이었다. 그는 경빈이 그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는 것까지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영채는 흥을 완전히 깨버렸다. "그러면 우리도 함께 가겠어 요!" 이런 사태까지는 미처 예상을 못했었다. 경빈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사 실상 그가 가버린다면 영채는 당연히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규가 그를 대신해서 분위기를 풀어 나갔다. "영채 씨, 아직 시간이 일러요. 진짜 재미있는 시간은 11시 이후부터 라니까요. 두 분 모두 모 처럼 왔는데 좀더 앉아 있다가 가죠." 영채는 결국 철규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경빈은 속으로 안 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일 연락할게.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 이해해 줘." 그가 서둘러 주점을 빠져 나왔을 땐 청량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한 대의 택시가 문 앞에 와서 멎었다.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운전사가 머리를 돌려 그를 보며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벽담이라고 소리쳤다. 운전사는 백미러에 반사된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출발시켰다. 주점을 빠져 나왔을 때나 차를 탄 후에도 경빈은 벽담에 갈 생각은 전 혀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벽담이란 말이 튀어 나왔을까? 설마 그녀가 이 늦은 밤에 벽담에 갔을까? 만일 갔다면 무엇 때문에 간 것일까? 춥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오싹했고 자꾸 만 몸이 떨려왔다. 갑자기 진송희가 생각났다. 만일 곽시예가 벽담에 가서 자살을 했다면 서둘러 간들 아무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대단히 조급해졌으나 운전사를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비좁은 도로에 비해 워낙 차가 많았던 탓에 빨리 운전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도리어 일이 더욱 복잡하게만 될 것 같았 다. 게다가 벽담에서 그녀를 꼭 만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어쩌면 혼자 영화를 보고 있거나 친구를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왕씨가 대북에 와서 그녀가 자주 가던 몇몇 친구의 집을 찾 아본 후였다. 그러면 그녀는 정말 혼자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까? 사실 경빈은 벽담을 제외하고는 달 리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차가 신점에 도달하자 곧장 운전사에세 재방으로 가달라고 했고 그 곳에서 도착하자마자 그는 얼른 내렸다. 운전사는 돈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손님이 혼자 벽담에 가서 자살할 것 같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잔돈을 받은 후에 물었다. "선생님,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까 요?"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빈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운전사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저는 급하지 않습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릴까요?" 경빈은 자신 의 상황이 그에게 의혹을 불러일이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에 일부러 웃어 보였다. "친구를 찾으러 왔는 데 언제 돌아갈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요. 한없이 기다릴 수는 없으니 먼저 가는 것이 좋을 듯싶군 요." "그러면 삼십분만 기다리지요." 운전사는 그가 자살할 것 같지는 않다고 느꼈는지 한결 마음을 놓은 듯했다. "만일 삼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그냥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경 빈은 제방 쪽으로 달려갔다. 구름다리에 올라가니 벽담의 정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언덕 옆의 산위에는 무수한 불빛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고 유흥가 쪽에선 아직도 갖가지 조명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마치 2월의 양명산에 활짝 핀 앵화와 두운화 같았다. 술집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뒤쪽의 시장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뒤섞여 거대한 소음을 이루었다. 물위에는 아직도 몇 개의 유람선이 어렴 풋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대체로 적막했다. 검은 배경에 간간이 박혀 있는 별들 사이로 달은 보이지 않았다. 별빛은 물 위로 떨어져 수면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잠든 수명은 더욱 고요했 다. 구름다리에는 몇몇 사람이 오갔고 휘파람 부는 소리도 들였다. 다리 위의 판자가 가볍게 흔들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경빈은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다가 적막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더욱 더 마음이 불 안해졌다. 대체 그녀를 어떻게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벽담 낙원의 큰 바위 정상에 있는 찻집에도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다리 위를 오가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심 히 살펴보았다. 대부분 서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산책을 즐기는 연인들뿐이었다. 이런 곳 에 그녀가 있을 턱이 없었다. 다리를 지나 산기슭을 따라 걷다가 찻집에 들러보았다. 산길은 걷기다 몹 시 불편했다. 게다가 불빛도 어두컴컴해서 그야말로 한치 앞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몽롱한 불빛을 배 경으로 한 찻집에는 아직도 몇몇의 손님이 남아 있었다. 거의가 커플이었고 홀로 있는 손님은 남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실망하고 돌아서려다가 문득 한쪽 구석자리로 눈길을 주었다. 순간 너무 놀라 소리 칠 뻔했다. 눈에 익은 한 여자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그녀는 난간 쪽에서 앉아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 었다. 단지 내려뜨린 머리칼과 짙은 상의를 보았을 뿐이나 그는 벌써부터 심장이 고동치는 걸 느꼈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 곽시예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아는 척 할 수 없었기에 빙 돌아서 그녀의 등뒤로 갔다. 확실히 곽시예가 분명했다. 그는 먼저 가볍게 기침을 한번하고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예 씨!" 그녀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얼굴 표정은 한마디로 형언할 수 가 없었다. 초조와 긴장으로 휩싸인 창백한 얼굴은 뭔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작은 사슴처럼 한 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이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선생님!" 경빈은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의식적으로 긴장한 표정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매우 차갑고 식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물었다. "시예 씨, 오랫동안 여기 있었죠?"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긴장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안정된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서워 죽겠어요. 저 사람이..."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쪽을 가리켰다. 들어올 때 그가 눈여 겨보았던 유일한 남자 손님이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돌려 힐끔 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경빈 은 그녀의 옆 좌석에 앉았다. "저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계속해서 집적겨려서 죽을 뻔했어 요. 몇 번이나 이 자리로 와서는 얘기를 나누자고 추근대는데 무서워서 감히 나갈 수도 없었어요." "긴 장하지 말아요." 경빈은 그녀의 손을 두드리며 웃었다. "지금은 가버렸어요." 이때 웨이터가 옆에 와서 주문을 받으려 했다. 경빈은 은근히 의논하는 투로 물었다. "늦었으니 가야겠죠?" 시예는 간절한 눈빛 으로 그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지금도 좀 불안해요. 조금 더 앉아 있다 가면 안 될까요?" "좋 아요." 경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주문했다. 그는 상의를 벗어 그녀의 몸에 걸쳐 주었다. 그녀는 몹 시 놀란 데다가 오랫동안 밖에 앉아 있어서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차츰 따뜻해졌고 창 백하던 입술 역시 붉은 색을 되찾아갔다. 25 마지막 남은 한 척의 유람선이 물위를 미끄러지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강의 적막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배의 불빛이 구름다리를 비추며 지나가 버리자 강은 완전히 적막에 싸였다. 위쪽에 서 들려오던 확성기 소리도 언제 그쳤는지 들리지 않았고, 쓸쓸한 가로등만이 산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 새 밤은 깊어갔다. 마치 어린 소녀처럼 경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시예는 평안함과 든든함을 느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 죠? 제가 어떻게 시예 씨 같은 분에게 무관심할 수 있겠어요?" "제 말은 선생님이 제게 무관심하다는 게 아니고, 제가 혼자서, 그것도 저녁에 온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해서요." "물론 저도 처음에 이곳에 올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오셨죠?" 경빈은 웃으면서 자기의 머리를 가리켰다. "영감이죠." "많이 돌아다니셨나요?" "아뇨. 택시를 탔는데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오게 되더군요. 순전히 직감이었 어요." "제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걱정됐나요?"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시예 씨한테 무슨 큰 근심이라 도 있습니까?"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저는 지난번에 자살하려 했던 진송희 씨가 자꾸 떠올랐어요. 그녀의 용기가 한없이 부러웠답니다." "그녀는 이제 다 나았습니다." 경빈은 다시 불안해졌다. "아 마 실연의 상처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다죠?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제가 만일 그녀였다면, 아마 여기 와서 뛰어내렸을 거라고." 그녀는 아래쪽의 깊은 호수를 손으로 가리켰다. 검푸른 호수 한가운데 가로 등 불빛이 드문드문 아른거렸다. "저 같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실연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결코 이 세상의 마지막을 의미하진 않아요." "선생님은 여자를 몰라요. 여자는 일생동안 오로지 단 한 번의 진정한 사랑을 꿈꾼답니다." 경빈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가 진성민 과의 사랑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혼잣말을 하 듯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 오랫동안 앉아 있었어요. 정말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 지만 강에 그렇게 많은 배들이 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만일 내가 뛰어내리면 소동이 벌어졌겠죠. 그들이 나를 구했을 테고, 그러면 난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모래사장 위에 눕혀졌을 거예요. 많은 사람 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들었을 거구요. 난 그게 싫었어요. 그런데 어떤 이상한 사람이 와서 나를 끊임없이 귀찮게 굴 땐 정말 죽고 싶더군요." 경빈은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웃으며 말했다. "난 그에게 고맙게 생각해요. 그가 귀찮게 하면서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제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치, 너무 해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실이잖아요. 만일 시예 씨가 일찍 일어섰다면, 나는 허탈한 기분 을 맛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찾을 생각을 어떻게 했나요?"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아뇨, 난 알고 싶어요." 그녀는 그의 몸을 흔들었다. 경빈은 그녀의 어머니가 사람을 곳곳에 풀어 그녀 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없었다. "이삼 일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잠시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모님께서 시예 씨가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나갔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곧바로 저를 찾아 나섰던 거예요?" 경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예 씨." 경빈은 그녀의 의중을 떠보려는 듯 물었다. "왜 갑자기 이곳에 오고 싶어졌습니 까?"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진 선생에게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 었습니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 그가 이렇게 묻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전에 진성민과 자 주 이곳에 왔었다고 한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녀는 이곳을 좋아했으며, 여기 오면 마음이 차분히 가 라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예전에 제가 여기에서 성민 씨를 기다렸다고 했던 말을 아직 잊지 않으셨군요." "네, 기억합니다. 바로 그 기억 덕분 에 여기 와서 시예 씨를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제가 여기서 성민 씨를 만날 수 없다는 것 을 알고 저를 급히 찾아 나선 거죠. 그렇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있으려면 얼마나 두렵겠 습니까? 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당신을 찾았던 겁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 다. "선생님은 그가 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요." 경빈은 순간 몹시 당황했다. 그녀가 오늘 저녁엔 약간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이럴 땐 가급적 조금이라고 빨리 그녀를 집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되물었다. "시 예 씨는 그가 오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까?"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손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 소녀인 양 안고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가 여전히 안절부 절못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머리를 그의 무릎 위에 의지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난처 하고 곤혹스러웠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랐지만 이대로 계속 울게 할 수도 없었다. 차를 파는 정자 엔 손님이 두세 명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계속 울면, 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게 뻔했 다. 그녀는 눈물 섞인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날 속였어요, 모든 사람들이 날 속이고 있어요, 나는 그가 올 수 없다는 걸,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이 말뿐이었다. "시예 씨, 슬퍼하면 몸만 상하게 되요!" "당신들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어요. 나 역시 자신을 속였고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성민 씨는 죽었어요! 난 알고 있어요.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예요! 난 왜 죽지 못할까? 난 왜 뛰어내리지 못할까?" 경빈은 마치 둔기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성민의 죽 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그녀는 벌써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로 기억을 상실했으며, 그가 이미 죽어버린 것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속여왔던 것이다. 뜻밖의 상황은 경빈은 더욱 당황케 했다. 그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왜 지금에 외서야 갑자기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정말로 예전부터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아니면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단 말인가? 그는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하고 그녀가 하는 대로 잠자코 내버려두었다. 실 컷 울고 나면 마음속에 쌓였던 응어리가 풀리게 될지도 몰랐다. 정말 그의 생각은 옳았는지, 그녀는 한 바탕 울고 난 뒤 평정을 되찾아갔다. 어째든 그녀가 조용해지자 경빈은 마음이 조금씩 놓였다. 말없이 웃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준 그는 그녀가 눈물을 훔치고 나자 일으켜 앉혔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애처롭기만한 그녀의 눈빛은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을 담고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은 언제나 제게 과분할 정도로 잘해 주시는 군요, 제가 귀찮게 굴어서 싫으시죠?" "이 한 가지만은 믿어주세요. 자신을 위한 일을 귀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 을 겁니다. 저는 시예 씨를 제 자신보다도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민 씨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 역시 저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에 고마워할 거예요." 경빈은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변화가 너무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니면 나쁜 현상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만 일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성민의 죽음을 진실로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까? 현재의 상황만 으로 그녀를 본다면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전에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그녀의 병이 나은 증거라고 확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고, 그가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자기 도 모르게 자신은 그녀를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하고 있다고 말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그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 나 그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영채가 집에 돌아온 이후 시예와 그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만인 그녀가 갑자기 벽담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 그녀와 단둘이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마침내 찻집엔 그들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둘은 난간의 한 모서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경빈은 조 용히 그녀를 설득했다. "우리들도 가야 할 것 같군요." 그녀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일어났다. 아래쪽의 검푸른 호수를 굽어보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돌려 구름다리와 그 맞은편의 절벽, 멀리 어두운 밤하늘의 별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곧 시선을 거두었다. 경빈은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그녀의 내면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 장소와 작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이곳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장엄하고 온화하게 서 있는 그녀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여신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낮은 탄식을 뱉어내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 작아 옆에 있던 경빈조차도 거의 듣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후 그 녀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우리 가요." 산길은 갈수록 외지고 험했으며,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 다. 경빈은 그녀를 부축한 채 숲길을 걸어나왔다. 만일 그녀를 찾지 못했다면 이 어둡고 인적 없는 길을 그녀 혼자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왜지 그도 약간 무서웠다. 강 위로 길게 나 있는 구름다리 위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쇳소리가 삐거덕거 리며 울려 퍼져 사뭇 괴기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겁이 났는지 경빈을 꼭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긴 다리를 건넜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없었다. 경빈의 마음 은 무척 무거웠다. 그는 비로소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관심 이상의 것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만일 그가 영채를 만나기 이전에 그녀를 알았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그러나 때늦은 지금은 그녀에 대한 감정을 가슴 깊이 감춰둘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사랑받는 것은 즐 겁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괴로운 고통이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었다. 사랑 받는 즐거 움에 대해선 아직 진실성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만일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즐거움보다 는 괴로움이 훨씬 크다는 것은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성민에 대한 시예의 사랑이 그렇고, 그 자신도 마 음속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소 있는 곽시예라는 여자 때문에 이미 그 고통을 겪는 중이었다. 그러 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마치 달콤한 꿈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경빈은 이 다리가 끝없이 이어져서 그녀와 함께 내일을 향해, 아니 생명의 종착역을 향해 영원히 걸어간 수 있기 를 진심으로 바랐다. 다리를 다 건너도록 그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 짧은 꿈을, 이 행복한 꿈을 깨뜨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마침내 다다른 다리 끝은 그들을 현실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마침 다리 옆 에 서 있던 한대의 택시가 그들 앞에 와서 멎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르는 그녀의 손에서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험한 길을 걸어오느라 힘이 들어서 그럴 거라 생 각하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차가 출발하자 그녀는 피곤한 듯이 두 눈을 감고 경빈의 어깨에 몸 을 기댔다. 그녀의 얼굴이 어깨에 닿자 그는 불에 델 것 같은 뜨거움을 느끼고는 비로소 그녀가 심상찮 음을 깨달았다. 그는 팔을 둘러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그의 품속 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호흡은 거칠었고 온몸이 불덩이 마냥 뜨거웠다. 경빈은 운전기사에게 조심해서 운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고른 숨소 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아마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스쳐 가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모 습은 마치 동화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평온하게 느껴졌다. 그는 눈썹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편안한 자세로 마음놓고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은 앞 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마음속엔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 른 여인과 비교할 수 없는 풍부한 내적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는 숨소리마저 최대한으로 죽이고 그녀 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차가 대북을 지나는 동안 그는 영채 일행이 아직도 주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그는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눈부신 가로등 불빛과 흔들이는 차가 잠깐씩 그녀를 깨웠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잠들었다. 경빈은 그녀 가 기댄 쪽 어깨가 저려왔지만 처음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그녀를 깨우고 싶지않아서였다. 경빈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더라면 그 찻집에서 그토록 오래 앉아 있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물론 집에 일찍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재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 못지않게 그 또한 일찍 돌아가고 싶은 마 음이 없었음을 부인하지 못했다. 그녀와 단둘이 좀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집에 도 착했을 때는 밤이 무척 깊어 있었다. 26 한밤중이었지만 곽 사장 댁 대문 밖으로는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차가 갈 림길로 들어서자 대문 안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시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그녀를 찾기 위해 여러 곳을 헤매고 다녔을 것이자 두 명의 경찰이 정원에 서서 차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씨는 차가 대문에 들어서는걸 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아주 놀랍고 반가운 기색으로 문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아가씨 돌아오셨어요!" 경빈은 급히 그에게 소리지르지 말라고 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깊은 잠 에 빠져 있었다. 응접실에서 서성이며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왕씨의 말에 화 들짝 놀라며 현관으로 달려나왔다. 곽 사장 부인 뒤고 과 사장과 구 원장이 바싹 붙어 뛰어나왔고, 그 뒤로 양금이 따라왔다. 왕씨는 시예가 경빈의 품에 쓰러져 자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조용히 차 문을 잡아 주었다. 부리나케 뛰어나온 곽 사장 부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딸의 머리를 매만지며 신음 하듯 이름을 불럴댔다. "시예야! 시예야." 간신히 운을 뜬 그녀는 마치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입술 을 한번 움직였을 뿐 이내 눈을 감았고, 다시 잠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 겁니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에 열이 좀 나는군요." 구 원장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관자놀이를 만져보았다. 자신도 긴장될 정도로 열리 상당히 높았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경빈아, 우선 시예를 방으로 옮겨 눕히거라. 내가 가서 볼 테니까." 아직 시예의 방 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경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사정이 급한 만큼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 는 그녀를 안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곽 사장의 부인이 총총걸음으로 앞장서자 경빈이 그 뒤를 따랐다. 시예를 침대 위에 눕히기가 무섭게 그녀의 어머니는 얇은 이불을 딸에게 덮어 주었다. 뒤따라온 구 원 장이 맥박과 체온을 쟀다. 체온계를 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열은 이미 39도 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얼른 처방을 적어 곽 사장에게 건넸다. "왕씨에게 심부름을 좀 시켜야겠습니 다. 시예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우리들은 아래로 내려갑시다." 경빈은 모두가 응접실로 내려가 앉은 후에야 그 동안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찻집에서 시예를 찾았을 때만 해도 얼굴이 조금 창백 했을 뿐 괜찮았는데,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약간 힘들어했으며 차를 타고나서 보니 열이 매우 높았다고 설명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긴장되었던 근육을 풀며 안심했다. 그가 시예를 안고 집으로 들어설 때만 해고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무슨 사고가 생겼거나 자살을 기도했는지도 몰라 매우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곽 사장 부부는 경빈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잊고 있었다. 경빈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부인은 딸을 돌보기 위해 곧바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구 원장은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기는 며칠 쉬기만 하면 곧 좋아질 정도니 그다지 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 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그녀가 경빈에게 성민의 죽음을 안다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매우 중요 한 사항입니다." "그게 시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까? 좋은 현상입니까, 아니면 나쁜 현상입 니까?" 곽 사장은 몹시 초조해 했다. "단순히 그 애가 했던 말로만 분석할 수 있는 데 아닙니다." 구 원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반응이 만약 시예가 이제까지 성민의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지금 에서야 알게 된 상태에서 비롯된 거라면 상식으로 보더라도 비정상적이지요. 시예는 사실을 안 뒤에 매 우 상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가정으로, 과거에 이미 그의 죽음을 알았다가 크게 병이 나게 된 이후 그가 죽었다는 걸 알지 못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정신분열증상입니다.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시예의 잠재의식이 불행한 소식을 받아들이길 거부했기 때문이죠. 그런 상태에서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 올 때 그가 이미 죽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금의 반응은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시예가 이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곽 사장은 희망에 들 떠 있었다. "내 딸의 병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지금의 반응을 고려한다 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구 원장의 다음 말은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반응을 좀더 살펴보아야만 알 수 있어요. 만일 시예가 다시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고 그가 돌아오 길 기다리지 않는다면, 이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더 이상 잠재의식에 의해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정해도 좋을 겁니다" 곽 사장은 점점 희망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구 원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현재 시예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증명된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시예에게 이 상황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떤 반응 을 하는지, 그리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정도를 주의하여 살펴야만 합니다. 이번에 생긴 병은 오히려 시예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시예를 관찰하는 데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만일 시예가 침대에서 며칠만 눌러 쉰다면 정신은 완전히 회복될 겁니다." 곽 사장의 얼굴에 또다시 희망이 피어올랐다. 경빈을 향해 돌아선 그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주 선생, 며칠만이라고 더 머물러주지 않겠나?" 경빈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 집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구 원장이 해명하듯이 말했다. "저녁에 대북에서 연회가 있어 곽 사장과 만났었네. 시예의 상태가 요즘 많이 좋아졌으니 자네 를 다시 병원으로 불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네. 병원에도 일손이 딸리기 때문이지, 곽 사장은 내일 자넬 병원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었어. 하지만 지금이 시예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야. 내 생각에도 자 에가 며칠 더 이곳에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네." 구 원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곽 사장 이 말을 받았다. 그의 음성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주 선생, 만에 하나 자네가 오늘 저녁에 내 딸을 찾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네, 난 정말 자네에게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 자네가 여기 있어만 준다면 시예는 곧 병이 나을 걸세. 자네를 무척 신뢰하기 때문에 자 네가 아니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네 그래서 나와 집사람은 자네가 며칠만이라도 더 무를 수 있기를 ..." 경빈은 더 이상 망설이지 못했다. "사장님.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이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 어른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왕씨가 부탁했던 약을 가지고 돌아오자 구 원장을 늘 휴대하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 속에서 주사기구를 꺼내들고 곽 사장과 함 께 이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엔 경빈 혼자만 남게 되었다 언뜻 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경찰이 주위를 서성이고 서 있었다. 그가 왕씨에게 물었다. "저기 밖에 있는 경찰들은 무엇때문에 아직도 돌아가지 않 았습니까?" "그들은 아가씨 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매우 뜻밖의 대답에 경빈은 고개를 갸웃거렸 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왔어요?" 왕씨는 머리를 긁어댔다. "아. 선생님은 아가씨를 찾으러 가셔서 병 원에서 일어나 일은 모르시겠군요. 천광열이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도망쳤다고요?" 경빈은 깜짝 놀랐다. "언제요? 여기 찾아와 행패를 부렸어요?" "아닙니다.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 합니다만... 제가 11시 대북에서 돌아와 보니 마침 병원에서 전화가 왔죠. 천광열이 의사 한 분을 다치게 하고 기숙사에 서 양복을 훔친 뒤 기숙사 뒤쪽 담으로 도망쳤다는군요. 연락을 받은 사모님께선 매우 긴장하셔서 급히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서 사장님께 연락을 취하고, 경찰에 연락해서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행히 사장님이 곧바로 집에 들어오셨고 경찰도 출동했지요." 경빈은 왕씨의 말을 다 듣고서야 흥분을 좀 가 라앉혔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황철규에 대한 미안함이 느껴졌다. 천광열은 그의 건의로 철규가 반 격리 치료시키던 중이라 병원에선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앞쪽의 일부 장소를 제외하고는 뒤쪽 의 몇 개의 병실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는데, 뜻밖에도 천광열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숙사로 빠져 나가 사람을 해치고 도망칠 중이야.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언 젠가는 들이닥칠 것이리라. 그는 만일 자신이 여기 있는 동안에 천광열이 들이닥친다면 그를 다루는 것 쯤은 문제가 안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미 병원에서 경찰서에 신고한 이상 그는 담수 부근에도 못 미쳐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두 분 어른께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공 연히 망설여졌다. 만일 그가 곽 사장 댁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곽 사장이 시예의 아버지가 아니 라면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관계가 맺어진 이상 그의 입장은 달아질 수밖에 없었 다. 왕씨가 조용히 물러나고 얼마 뒤 구 원장과 곽 사장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온 구 원장은 탁자 위에 내려 놓은 물건을 정돈하면서 말했다. "푹 자도록 하면 내일 아침엔 열이 내 릴 겁니다. 그때 약을 먹이면 문제 없어요." 곽 사장의 얼굴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열이 틀림없이 내리겠죠?" "만일 내일 아침까지도 열이 내리지 않거나 다른 이상이 있으면 내게 전화를 해 줘요. 주 선생이 여기 있으니 아침에 맥박과 온도를 체크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경빈이 대신 대답 했다. "나는 갑니다. 편이들 쉬십시오." 구 원장이 가방을 들고 나가려 하자 경빈은 용기를 내어 그를 불러세웠다. 천광열의 일을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가 좋을 것 같 았던 것이다. "방금 왕씨에게서 천광열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잠 시 시간을 내서 곽 사장님께 해명하고 싶습니다." 곽 사장과 구 원장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 의 표정은 마치 경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했다. 곽 사장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대했다. "주 선생. 이 일로 너무 걱정하진 말게나. 난 자네를 오해하지 않 네. 자네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는지 구 원장에게 들었다네. 구 원장을 만인 자신이 자네였더 라도 역시 그렇게 처리했을 거하고 하더군. 그러나 때에 따라서 소문과 사실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있다네. 적당한 기회를 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세." 구 원장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내 생각에도 다름에 얘기하는 것이 좋아. 그리고 자네에겐 아무 잘못이 없네." 경빈은 고개를 숙 인 채 구 원장의 가방을 받아들고 문 밖까지 따라나갔다. 두 어른은 걸어가면서도 계속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 원장이 차에 올라타자 장씨는 문을 닫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곽 사장은 구 원 장을 배웅한 후에 경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함과 동시에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일렀다. 그제서 야 경빈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도 그렇게 하는 게 나르리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와 왕씨가 함께 있는 한 설사 천광열이 와서 소란을 피운다 해도 별 문제없이 해결할 것 같았던 것이다. 경빈은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된 뒤에야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그제서야 비로소 영채 생각이 났다. 손목시계는 벌써 새벽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까지 중앙주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설령 그들이 계속 기다렸다해도 지금은 영업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더 지났을 시간이었다. 어차피 그들도 돌 아갔을 것이다. 이제 영채에게 뭐라고 해명할 것인가. 물론 그 당시에는 설명하기도 힘들었거니와 급히 주점을 나온 이후에도 전화 한 통 해주지 못했다. 비록 나름대로 사정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조름 미안 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그녀는 무척 화를 내면서 집에 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전화를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응접실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지만 왠지 망설여졌다. 모든 방의 불은 이미 꺼져 있어 소 리하나 없이 고요했다. 이 집 사람들은 다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깨우고 실지 않았다. 결국 가볍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더군다나 구 원장도 아마 지금쯤 집에 막 도착했을 것이며 영채 는 이미 잠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전화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일일 것 같았 다. 만약 구 원장이 전화를 직접 받는다면 시예한테 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놀랄 것이 뻔했다. 차 라리 내일 아침에 전화해서 자초지정 얘기를 하면 영채도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 자 문득 밤이 정말 조용하다고 느껴져다.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어서 그런지 정적은 더욱 깊었 다.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만이 밤의 처량함을 달래주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왔다. 영채와 정신없이 지내다가 시예 때문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마감하고 나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27 아침이 되자 열은 내렸다. 시예는 이제 정신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몸이 많이 쇠약해진 탓에 침대 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경빈이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양금이 찾아왔다. 급히 이층으로 올라와 시예 를 좀 봐달라는 곽 사장 부인의 부탁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 에 누운 채 얇은 이불을 덮고 있던 시예는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녀는 지난밤의 일들을 기억 하는 듯 약간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시예 씨."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좀 어떻습니까?"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아요." "구 원장님이 조금 있다가 너를 보러 오시겠다고 했단다." 곽 사장 부인이 끼여들며 말했다. "방금 전화로 네 상태 를 물어 보시더구나." 경빈은 그녀의 관자놀이를 짚어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곁에 있어 손을 대기가 쑥스러웠다. 잠시 망설이다가 체온부터 재 보기로 했다. "제가 우선 체온을 재보겠습니다." 시 예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는 온도계를 그녀의 입 속에 넣은 후 손목을 잡고 맥박을 쟀다. 맥박은 조금 약했지만 체온은 어제보다 많이 내린 38도였다. 일단 마음이 놓인 그는 그녀와 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계속 질문을 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자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엄마, 저 선생님과 둘이서만 얘기 좀 나누고 싶어요. 몸은 괜찮으니 안심하게요." "그렇게 하렴,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내가 마련해 줄게." "괜찮아요. 선생님이나 좀 갖다드리세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얘기들 나눠요." 부인은 그래도 불안하다는 듯 딸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오래 얘기하지 는 말아라." "엄마도..." 그녀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건 선생님이 더 장 알아요. 의사 선생님이잖아 요." 그제서야 부인은 나갔고 경빈은 웃으며 농담을 했다. "당신은 의사를 무척 싫어하잖아요." "맞아 요 저는 어려서부터 잔병이 많아서 줄곧 의사가 함께 살다시피 했어요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제게 쓴 약을 먹게 하거나 주사를 놓는 일뿐이었죠. 그래서 전 늘 의사를 싫어했어요." "저도 거기에 포함되는 겁니까?" 경빈은 웃으면서 물었다. "아뇨, 선생님만 제외예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주 선생님은 제게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지 않잖아요. 게다가 어머니가 귀찮게 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패가 돼 주셨고요." "조금 있으면 구 원장님이 주사를 놓으러 오실 겁니다." "겁주지 마세요." 그녀의 말이 애처롭게 들렸다. "나는 괴로울 만큼 충분히 괴로웠어요. 머리는 두통과 어지러 움으로 깨어질 것만 같고 입안도 써서 죽을 지경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편히 하루나 이틀 정도 쉬 고 나면 많이 좋아질 겁니다." "좀 앉고 싶어요. 일으켜 주시겠어요?" "그러죠." 경빈은 그녀를 부축 하여 앉혔다. 몸을 절반쯤 일으켜 벽에 기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세요. 어제 저녁에 제가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나요? 제 기억으론 선 생님이 저를 부축해서 차를 태워주신 것 같은데요." "맞아요. 다리를 건넸을 때 운 좋게도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다리 위를 걸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어두컴컴한 곳에서 불빛에 비치는 두개의 그림자를 본 것 같아요. 반대편에서 무엇이 왔는지 잘 보지 못했어요." " 그때 이미 당 신은 감기에 걸린 겁니다. 정말 이렇게 까지 심해질 줄은 몰랐어요." "차가 출발한 후 길 옆에 늘어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눈이 몹시 부셨던 것과 우연히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 외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밤이었고, 온 가족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구 원장님도 계셨죠. 그는 별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돌아가셨어요." 그를 바라보며 얘기를 듣던 그녀는 잠시 후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연속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마음이 매우 불 안정하다는 증거였다. 한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늑해요. 도대체 꿈을 꾼 건지 아니면 현실이었는지 구분이 안 가요. 무척 깊은 잠에 빠졌었나 봐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어제 저녁 일들이 도통 기억나지 않아요." 경빈은 간략하게 벽담에서 그녀를 찾아 집으 로 돌아온 것과 그 후의 일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시예는 눈을 내리깐 채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 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선생님이 나를 찾지 못했다면 지금쯤 전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시예 씨!" 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제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라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저는 그곳 정자에 혼자 앉아서 줄곧 병원 에서 자살하려 했던 진송희를 생각했어요. 그녀가 참으로 용감하게 느껴졌여요. 그런데 그때 이상한 남 자가 저를 계속 지켜보는 바람에 곧 그곳에 간 걸 후회하고 말았어요. 그가 무서웠어요. 다리 위만 쳐다 보며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기를 애타게 기원했어요. 그러나 다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가로등 불빛 조차 약해서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저는 당신이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너무 말을 많이 하면 해로워요." 경빈은 그녀가 말을 그만하도록 부드럽게 유도했다. "당신은 재가 의사라고 말했지요. 그럼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 고 입술을 두어 번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빈은 그녀의 눈빛 속에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눈치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생각을 앍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묻고 싶지도 않았다. 상념에 빠진 채 침묵하는 가운데 구 원장이 들어섰다. 구 원장은 웃는 얼굴로 그녀 를 달래면서 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다. 구 원장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시예는 삼사 일 내로 완전히 회 복할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나서 경빈과 함께 병원으로 돌아갔다. 경빈은 심정이 복잡한 만금 할 일 이 많았다. 먼저 구 원장 댁에 들러 영채한테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씨 는 그녀가 아침 일찍 대북에 갔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 래 이렇게 이른 아침에 대북에 갔단 말인가? 다른 날 같으면 미리 연락을 하거나 그와 함께 갔을 것이 다. 그렇다고 수 원장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구 원장도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일단 병원에 가서 천광열의 소식을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쳘규를 찾았다. 철 규는 몹시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한쪽으로 끌고가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넌 알고 있니? 네가 말썽을 일으킨 것 말야." "알아." 경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안다고?" 철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럼 상관이 없단 말이니?" 경빈은 당연히 그가 천광열의 일을 추궁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문제라면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이미 두 어른께 양해를 구했고, 그들도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규에게 그런 사실을 알 려 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천광열이 도망친 사건 말씀이죠. 안 그래도 어제 저녁에 두 분과 얘기를 나눴어요. 모두 제 행동을 충분히 이해해 주셨어요." "하지만 너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어!" 황철규 는 진지하게 말했다. "누구지?" 경빈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철규는 남의 불행을 즐 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짓궂게 웃으며 캐물었다. "너 어젯밤에 어디 갔었어?" 경빈은 갑자기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영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다. 그녀는 이미 그가 시예를 찾으러 갔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전에 말하지 않았다 는 이유로 화가 나서 아침 일찍 혼자 대북에 가버린 것이다. "형, 어젯밤 몇 시에 담수로 돌아왔어요?" "지금 내가 네게 묻고 있잖아!" "형도 잘 알고 있잖아요. 형은 제가 시예를 찾으러 간 걸 모른단 말입 니까?" "물론 지금은 알고 있지. 하지만 어제 저녁엔 왜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니? 연락조차도 안 해주 었잖아." "그것 때문에 제게 화난 거예요?" "화가 난 건 내가 아니라 너의 아가씨지." "형, 형은 그 상황을 이해하실 거예요. 내가 그녀를 찾으러 간다고 얘기하면 흥이 깨질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여럿이 함께 찾으러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설혹 그렇게 해서 찾았다하더라도 갑자기 여러 사람이 몰려갔더라면 시예 씨는 아마 불쾌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황철규는 담담하게 웃었다. "형." 경빈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중앙주점을 나오고 난 후의 상황에 대해서 얘기 좀 해주세요. 이렇 게 골치 아프게 꼬일 줄은 예상도 못했어요." 철규는 그가 매우 초조해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진 지하게 그가 떠난 후의 상황은 들려주었다. 경빈이 자리를 뜨고 오래도록 연락이 없자 영채는 짜증을 냈다. 참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가 경빈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고 말해주었 다. 시예를 찾으러 갔다는 말고 함께. 그때 철규는 역시 전화로 천광열이 도주한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 랐다. 그래서 영채를 설득해 일찍 돌아왔다. 경빈은 영채가 틀립없이 그를 의심했으리라는 것을 느꼈 다. 그러나 특별히 긴장할 일은 아니었다. 구 원장이 그때의 상황을 그녀에게 납득이 가도록 잘 설명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후에 구 원장과 함께 가서 그녀를 이해시키리라고 마음먹었다. 만일 그 녀가 그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구 원장이 도와주면 해결될 것이리라. 그는 영채에 대한 일을 일단 접어 두고 천광열에 대해 얘기했다. "철규 형. 원장님께 말씀은 들었는데 천광열이 닥터 송을 다치게 했다면 서? 대단치는 않겠지?" "그때 상황으로 봐선 천광열은 나를 찾고 있었어. 그는 오래 전에 내 방에 와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곳을 기억하고 있지. 날 만나러 왔다가 방이 비어 있으니까 양복과 바바리 코트 한 벌을 슬쩍했나 봐. 마침 옆방에 있는 송 선생이 기척을 듣고 내 방문을 열자 다짜고짜 그를 한 대 때리고는 도망쳐버린 거야." "아, 그랬군요. 송 선생을 한번 찾아가봐야겠군요. 결국 천광열의 소동 을 내 책임이니까."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그는 괜찮아. 다행히 살짝 피해서 정통으로 맞진 않았 어. 어깨에 비껴 맞았는데 부기가 조금 심해 지금 기숙사에서 쉬고 있어. 그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나와 하던 얘기나 마저 끝내자." "무슨 얘기?" 철규가 담배를 꺼내 물면서 경빈에게도 한대 권했다. 두 사람은 함께 담배를 피웠다. 잠시 후에 철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천광열의 일에 대해 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어." "지난번에 내게 얘기해 주었잖아요." "맞아. 우리는 그때 잠깐 동안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를 보통 병실로 옮겨 휴양시켰던 거야. 그러나 그건 우리가 실수한 거였어." "뭐라고? 실수 라고?" 경빈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설마 우리가 알아낸 그와 곽 사장과의 사건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겠죠?" "아니야. 전부 틀린 건 아니야. 맞는 사실도 있어. 그러나 천광열은 착각에 빠져 살고 있었던 거지. 곽 사장은 오래 전부터 임진희를 알고 있었어. 그녀는 이전에 어느 작은 술집에 있었지. 그게 벌써 삼 년 전의 일이야. 곽 사장은 그녀의 불행한 사정을 동정했기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 를 그곳에서 구해내 공장에서 일을 시켰어. 공장에서도 그녀는 성실했다고 하더군. 천광열은 그녀를 알 게 된 후 줄곧 쫓아다녔는데,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대해 주었지. 그러던 어느 날 곽 사장에게 해고된 직공 한 명이 천광열한테 곽 사장이 진희를 겁탈했다고 충동질을 했다는 거야. 일 은 이렇게 일어난 거야." "그렇다면 곽 사장과 진희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었나요?" "맞아. 그가 그녀를 안 것은 오래됐지만 그들 사이는 깨끗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죠?" "사건의 진상을 알기 까지는 두 번이나 우여곡절을 겪었지. 처음에 난 천광열의 말을 전혀 믿지 못했어. 그는 사람을 때리고 차를 부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정신분열증 환자가 틀림없었기 때문에 곽 사장에 대한 비난도 믿을 수 없 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후에 진희가 공장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다시 큰 술집에 나가기 시작했고 곽 사 장이 그 술집에 자주 들러 그런 그녀를 도와주었고, 또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밤 모임에까지 나타 나는 걸 알고는 천광열의 말을 믿기 시작했지." 경빈은 언젠가 밤중에 곽 사장이 어떤 젊은 여자와 같 이 차를 타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이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결국 천광열의 말이 증명된 거로군요." "그러나 최근에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어. 어제 오후에 미연이와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녀가 내게 새로운 정보를 주더군. 미연의 사촌 여동생이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고 얼마 지나 지 않았을 때 마침 경찰이 증거를 만들기 위해 진희를 데려와 검사를 시켰다는군. 그런데 검사결과 그 녀는 여전히 처녀임이 증명됐다는 얘기야." 경빈으로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우선 곽 사장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사실 천광열이 격리된 것은 마땅한 죄의 대가였는데 하필 왜 자신이 관여했단 말인 가? 그는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어떤 일이든 제삼자의 말만 듣고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 다. 천광열의 일은 두세 차례의 곡절을 겪고서야 비로소 진상이 밝혀졌는데, 이건 정말 실제적인 치료 경험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사람에 대란 인식 부족과 경험 부족이 일으킨 사고였던 셈이네요. 지난번에 곽 사장이 당한 사고나 어젯밤에 송 선생이 당한 일 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요?" 철규는 씁쓸하게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너보다 더 미 안하게 됐어. 지난번 곽 사장의 면전에서 당당하게 원장과 부딪힌 적이 있었거든. 사실 그들은 그때 나 를 야단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들이 우리 두 사람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니겠어? 역시 두 어른의 인격 수양은 우리들보다 훨씬 높다는 걸 새삼 느꼈어." "철규 형." 경빈은 마치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천광열이 잡혀 돌아오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가서 두 분 어른께 사과하는 것이 좋겠어요. 형 생각은 어때요?" "아마 그는 벌써 잡혔을 걸? 그 래도 그는 바로 이곳으로 돌아올 순 없을 거야. 그는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훔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여기보다는 교도소나 법원으로 가게 되겠지." "음, 아마 돌아온다고 해도 구 원장이 다시 받아들이진 않으시겠죠?" 경빈은 철규의 판단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난 불행 중 다행이야. 비록 옷 한 벌을 날리긴 했지만 한대 얻어맞는 것보단 훨씬 낫잖아." "그나저나 송 선생은 어떤지 보러 가지 않 을래요?" "너 혼자 가봐, 난 지금 환자를 봐야 돼. 그리고 어제 저녁에 그에게 다녀왔거든." 철규와 헤 어지고 난 후 경빈은 곧바로 송 의사를 보러 갔다. 그는 학구적인 얼굴에 도수 높은 근시안경을 끼고 있었다. 경빈은 그를 위로하는 자리에서 어젯밤 이야기를 좀더 상세히 전해들었다. 그는 철규의 방에서 발소리가 나는 걸 듣고는 슬리퍼를 끌고 나갔는데, 뜻밖에도 방문을 열자마자 주먹이 날아왔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에게 주먹을 날린 천광열은 어쩔 줄 몰라하며 그대로 뛰쳐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말을 하 면서도 송 의사는 아직도 공포감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철규와 경빈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사고는 정신병원에서는 어쩌다 한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송 의사는 일 년 전에 간호사를 다치게 한 환자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일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며 경빈을 위로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경빈은 여전히 그에게 미안했다. 이렇듯 미안한 마음을 잊지 않고 간직한다면 언 젠가는 보답할 날이 있으리라. 28 경빈과 구 원장은 점심때를 맞춰 원장 댁에 식사하러 갔다. 그때까지도 영채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원장 부인은 그에게 전날 저녁의 일에 대해 물었다. 경빈은 부인은 영채에게 전해 주 리라는 생각에 좀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구 원장도 경빈을 거들었다. 구 원장과 곽 사장은 술과 담소를 즐기다 늦게 돌아와서야 시예의 행방불명과 천광열의 도주사건을 알게 되었기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 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경빈이 시예를 찾지 못했다면 그들로서는 더욱 민망했을 것이다. 어찌 이 상황 에서 경빈을 두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빈은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개성이 너무 강한 그녀는 모든 일을 자신의 직관과 주관으로 처리하는 습성이 있었다. 부모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록 영채 는 만날 수 없었다. 경빈은 저녁엔 곽 사장 댁에 머무르면서 시예를 돌봐야 했다. 물론 곽 사장 부인이 그를 부르는 건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도망친 이후 줄곧 소식이 없는 천광열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밤에 불쑥 나타나 복수라도 할까 봐 두려운 테에 경빈이라도 곁에 있으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빈이 영채를 만날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만나러 가면 이 미 외출했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한번 외출하면 저녁이 지나서야 돌아왔으므로 저 녁 일찍 전화하면 안 들어와 있고, 늦게는 실례가 될까 봐서 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건 둘째치고 이틀 동안 통화조차 한번 못했다. 이런 경우는 그녀가 귀국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 국 후 며칠 동안은 거의 함께 지냈고, 어쩌다 몇 시간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 전화로 그 동안의 행적을 알리곤 했다. 지금 영채는 그를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날 밤의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분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빈은 왜 그녀가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렇다고 편지로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곽시예 때문에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장 부인이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원장 부인의 생활은 뻔했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가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으면 일어났고, 오후가 되면 거의 매일 집에서 마작을 즐기거나 친구 집으로 놀러 다녔다. 일본에서 마작할 기회가 없었던 만큼 귀국하자 마자 마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모녀지간에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경빈은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영채를 만나기 전에는 이 고민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다. 삼 일째 정오에 그가 막 구 원장 댁에 가려고 병원을 나설 때였다. 철규가 그를 불러 세웠다. "경빈아, 그날 이후로 영채를 만나 봤니?" 경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두 손을 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녀가 이번에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구나." "하지만 내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요. 설사 그날 저녁에 내가 잘 못했다 해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굴 이유는 없잖아요!" 철규는 어이없는 듯 웃었다. "경빈아, 넌 여전히 여자란 존재를 이해 못하고 있구나. 여자에게 사랑보다 더 심각한 게 뭐가 있겠어?" "나도 결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사랑과 질투는 불가분의 관계야. 그것들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걸 알아야 지." "형, 설교는 그만해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난 어떤 얘기도 듣고 싶지가 않아. 마음이 너무 혼란스 러워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구." "그런데, 너 지금 어디 가는 길이냐? 강물에 뛰어들려고?" "아직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아. 그녀 집에 점심 먹으러 가요." "정말 못 말리겠군..." 황철규는 장난치 듯이 가볍게 말했다. "난 너와 식사하러 왔는데!" "형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군요!" 경빈은 실눈으 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연하지. 먹고 자는 게 자유로운데 왜 즐겁지 않겠니?" "그렇군요. 그럼, 형이 나 즐겁게 지내세요. 나는 갑니다." 철규는 경빈이 화를 내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놀 리지는 않았다. "경빈아, 화내지 마. 만약 영채가 집에 없어도 거기 가서 점심을 먹을 거니?" 경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철규의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그는 화를 억누르며 철규에게 물었다. "그럼, 영채가 집에 없다는 말입니까?" "넌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철규가 되물었다. "조금 전에 전화로 물어 보았는데, 유자 얘기로는 영채는 보통 열한 시까지는 집에 있다고 하더라구요. 오늘도 아마 그때까진 나가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영채는 벌써 나가고 없어." 황철규가 계속해서 덧붙였다. "나 한테 전화가 왔는데, 대북에서 전화 거는 거랬어." "아!" 경빈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그래서, 형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더군. 내게 무슨 할말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어. 아 무래도 네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 경빈의 머리 속에 온갖 생각들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모두가 한결같 이 불안한 생각들뿐이었다. 영채가 왜 황철규에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을까? 그것이 사실일까? "경빈아." 철규는 경빈의 마음이 결코 편치 않다는 걸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점 심이나 하면서 영채와 너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틀간의 냉전으로 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아마 영채도 너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거야." "좋아요." "오늘 점심은 내가 사지. 자, 나가자." 10분 뒤 두 사람은 그들이 자주 가는 담수시의 조그만 음식점에 마주 앉았다. 그들은 앉자마자 음식과 술 한 병 을 시켰다. 경빈은 식당으로 오는 동안 황철규가 말했던 '냉전'이란 두 글자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사 소한 오해가 2, 3일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던 것은 영채가 시작한 냉전의 결과였다. 경빈은 그녀가 황 철규를 만나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면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규는 분명히 그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며, 어쩌면 경빈 자신이 해명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철규의 생각은 정 반대였다. 먼저 나온 술을 한 잔씩 들고 나서였다. "경 빈아,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어. 저녁에 내 대신 네가 영채를 만나는 거야." "내가?" 경빈은 깜짝 놀라 며 물었다. "그녀가 약속한 사람은 형이잖아요." "물론, 나와 약속했지.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녀가 냉전을 해소할 기회를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나와 약속을 하면, 틀림없이 네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면 곧 두 가지 결과가 생길 거 고..." 황철규는 술을 내려놓고 두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두 가지 결과란 무슨 뜻이죠?" 경빈은 진지하게 물었다. "첫 번째는 내가 너의 대변인이 되어 그날 저녁의 일을 사죄하는 거야." "맞아요. 나 도 그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형은 제삼자니까 오해를 풀기가 더 쉬울 거예요." "그러나 그 방법은 결 코 좋은 방법이 아니야." "어째서요?" "넌 아직도 여자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녀 가 왜 나와 약속했다고 생각하니? 내가 너에게 알려서 네가 만나러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거야. 만일 네가 안 나가면, 그녀는 내가 네게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알면서도 일부러 안 나왔다고 여길 거야. 그러면 오해는 더욱 커지겠지." 경빈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미처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철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만일 오늘 그가 나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더 욱 불쾌해할 것이 분명했다. "형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그녀를 만나는 거야." 철규 가 한마디로 분명하게 말하자 경빈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보고 가라고요? 그럼, 형은?" " 난 안가." "그러나 그녀가 약속한 사람은 형이잖아요." "야, 주경빈. 영채와 나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너희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물론 내가 안 나가면, 그녀는 화를 내겠지. 그러나 너희들 사이의 오해가 깨끗이 풀린다면 나의 깊은 배 려에 감격할 거야. 그런데 만일 내가 나가서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되면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오히려 어색해질 거야.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괜히 어색한 입장이 되고 말겠지." 철규가 웃으면서 말을 끝냈다. 경빈은 그의 마음씀씀이에 감격했다. 그는 철규가 여자문제엔 정말 탁월한 전문가라고 느꼈다. 그는 술 잔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감사의 뜻으로 한잔 드리겠어요. 난 확실히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멍청한가 봐요. 자, 건배!" 철규도 웃으려 술잔을 들었다. 곧이어 그는 경빈에게 경고하듯이 일렀다. "오늘은 이 쯤에서 끝내고, 다음에 다시 마시자. 너무 취하면 약속시간 안에 가기 어려울 거야. 그렇게 되면 정말 멍청한 거지." 경빈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약속 장소는 어디죠?" "이런!" 철규는 좀 과장된 몸짓으 로 자기 머리를 쳤다. "내 정신 좀 봐. 약속 장소를 가르쳐주는 걸 잊다니... 여섯시 반, 국빈호텔 12층 라운지야." "고마워요." 경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끼여들지 몰라.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 너 희들이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형이 와준다면 정말로 좋겠어요. 만일 우리가 서먹서먹 해 하고 있을 때라면, 형은 충분히 중재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야." "경빈아." 황철규는 다시 진지 해졌다. "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녀와 화해해야 해. 절대로 그녀와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많은 것을 양보하는 여자라 하더라도 사랑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아. 이 일은 반드시 당사자가 해결해야 하는 거야. 내가 끼여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좋아요, 좋아!" 경빈은 시원스럽게 대 답했다. 늘 마음을 무겁게 하던 문제에 해결방법이 생기자 경빈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철규의 말을 듣고 나서야 냉전이 좀더 일찍 해결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그녀가 부모의 설득에 넘어가리라고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가 좀더 일찍 그녀를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면 자질구 레한 설명 없이도 오해가 풀렸을 것이고,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황철규의 이론, 즉 아가씨를 뒤쫓는 것은 학문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곧 물러나게 된다는 이론이 정말 옳다고 생각되었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뭔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가만히 앉아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오리를 바란다면 그것보다 더 멍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경빈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제서야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깨닫게 되다니. 병원으로 돌아온 경빈은 서둘러 대북에 갔다. 먼저 학교에 가서 몇 권의 참고서를 찾은 그는 저녁 6시가 되기도 전에 국빈호텔 12층 라운지에 도착해서 영채를 기다렸다. 6시가 넘었지만 영채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구했다. 그는 여자친구를 기다린 경험은 극히 적었지만 참을성 은 대단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라운지엔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아,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 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잔 속의 얼음 조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채는 오지 않았다. 그는 초조 해지기 시작했다. 철규의 장난이라고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장난이 심하기는 하지만 이런 일로 후배 를 놀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빈은 영채가 오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요 며칠 동안 계 속해서 밖으로 나다녔다. 혹시 약속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계 바늘은 6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과연 그녀가 올까? 7시가 되어서야 영채는 모습을 드러냈다. 라운지 입구로 들어선 그녀가 안 쪽을 살피는 것을 발견한 경빈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심 긴장되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 지도 않은 척했다. 철규가 아닌 자신이 와 있는 걸 본다면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의 얼굴을 유 심히 살폈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얼마간 놀란 기색을 나타내었다. 영채는 경빈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황철규 씨는요?" 그녀의 음성은 금속음을 내며 차갑게 울려 퍼졌다. "좀 늦 게 올 거야. 병원에 일이 있어서..." 경빈은 그럴 듯한 이유를 댔다. "그가 경빈 씨를 보냈나요?" 경빈 은 처음부터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를 대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을 발견한 순간 그냥 나 가버렸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거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경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선 자리에 앉지. 앉아서 이야기하지." 거부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영채는 순순히 그의 맞은편에 앉아 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던 웨이터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시장할 텐데 뭘 좀 먹어야 되지 않겠어? 무얼 먹을까?" 그녀는 메뉴 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경빈 씨가 드시고 싶은 걸 시키세요. 전 별로 생각 없어요."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물러가자 침묵이 자리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 침묵을 깰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손을 식탁 위에 얹은 그는 몸을 앞쪽으로 내밀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채, 이삼일 동안 통 만나기 힘들었어. 오 해로 당신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아. 오래 끌어봐야 서로에게 좋을 게 없잖아. 이 기회에 서로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아무 내색도 없이 다만 콧소리로 '흥'하고 대꾸했다. 그리곤 침묵이 이어졌다. 단지 그의 얼굴에서 진심을 찾으려는 듯 슬쩍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해명마저 거부하지는 않겠 다는 표시였다. "영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경빈은 쉽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 내가 경솔 했어. 그러나 그때는 상황이 워낙 다급하고 위험해서 설명할 시간이..." 그녀는 계속 콧방귀만 뀌고 있 었다. "그날 저녁 어디 갔었죠?" 경빈은 당황스러웠다. 차갑기만 한 그녀의 태도가 갈피를 잡지 못하 게 했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다잡은 그는 사실대로 틀어놓을 생각이었다. 영 채가 몹시 화가 났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3일씩이나 그를 피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숨길 필요가 없었다. "병원에서 숙직 담당이 시예 씨가 실종됐 다고 전화했었어. 너무나 놀란 사모님은 하마터면 심장병을 일으킬 뻔했지. 사모님이 나에게 시예 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셨어." "경빈 씨 외엔 그녀를 찾을 만한 사람이 없었나 보 죠?" "사모님은 이미 여러 사람을 동원해서 찾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라고 하시더군. 사모님이 하는 수 없이 마지막으로 내게 모든 희망을 거신 거야. 몇 달 동안 내가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기 때문 에 그녀가 자주 가는 곳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셨겠지." "그럼 왜 저를 속이셨어요?" "영채, 난 당신 을 속인 게 아니야. 사실, 나는 모처럼의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미스 진과 황 선 배한테도 미안하고..." "그런 말은 누가 들어도 썰렁하겠네요." 영채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투로 입을 삐죽였다. "그때는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어." "철규 씨는 시예랑 동문이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난 시예의 친구가 아닌가 보죠? 만약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도 돕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당신 혼자 만 시예랑 친한 사이고, 혼자서만 찾을 자격이 있는 거였나요?" 영채의 강한 반발심이 오히려 경빈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그러나 시예 씨는 병을 앓고 난 후부터 성격이 괴팍스러워졌고 정서도 상당히 불안정했어. 그래서 난 그녀를 찾으러 가기 전에, 사모님에게 경찰이 그녀를 찾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 그렇게 되면 그녀의 자존심이 몹시 상할 게 뻔했거든. 만일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 나섰다는 걸 알았다면 그녀는 무척 불쾌했을 거야. 환자인 상태에서 집을 나갔는데, 거기에다 뜻하지 않는 일이 터진다면, 내가 어떻게 사모님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겠어?" "그럼 왜 그 전에 말해주지 않았나요?" "영채" 경빈은 간절히 그녀를 설득했다. "그땐 아무 것도 모르는 미스 진도 옆에 있었고 시간도 매우 긴박했어. 그때로선 그녀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몰랐고, 찾을 수 있다는 확신도 할 수 없었어. 시예 씨를 찾은 후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하 고 싶었지만 그녀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고, 그땐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라 전화를 할 수도 없었어.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당신을 찾아가 설명하려 했지. 그런데 당신은 연락도 없이 일찍 나가 버렸고, 삼 일 동안이나 나를 피하기만 했어. 난 정말 불안했어!" 영채는 화난 얼굴을 차츰 풀었다. 그러나 경빈의 사과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듯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경빈 씬 자신 생각만 하고 제 입장은 염려하지 않았어요. 제가 친구 앞에서 얼마나 난 처했는지 알기나 하세요?" 경빈은 구차한 변명보다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판단 했다. '여자들은 이치를 따지기를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 이치를 따지는 것도 듣기 싫어한다'는 황철규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못을 인정했다. "당신 말이 맞아. 사실 그땐 여러 가지 점들을 사전에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었어. 아마도 그때 상황이 조급하다고 판단했고 사람을 찾는 일에 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알고 계시는군요. 경빈 씨가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학 수 있었겠어요?" 영채의 말에는 바늘이 돋아 있었다. "경빈 씨의 마음속엔 오직 시 예뿐이고, 온통 시예 걱정으로 가득 찼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경빈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사랑과 질투는 불가분의 것이었다. 곽시예 때문에 바빠서 자기를 내버려 두었다 는 생각이 영채가 며칠 동안 화를 냈던 주요 원인이었다. 만일 그가 다른 환자 때문에 바빴다면 어땠을 까? 그녀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영채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난 너무 억울해. 물론 내가 그녀를 걱정한 건 사실이야. 그건 그녀를 치료하는 의사로서 마 땅히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 원장님과 곽 사장 사모님이 그녀가 회복할 수 있도록 잘 돌봐주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 내가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어? 다행히 그녀의 몸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사모님과 함께 출국하게 되면 그땐 나도 임무가 끝나는 거야." 경빈은 스스로 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 주 훌륭했다고 자부했다. 책임을 두 어른에게 미룸으로써 일단 영채의 입을 막았고, 또 하나 시예가 떠 나기 전에는 그의 일도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어른이 그에게 손을 떼라고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늘 곽 사장 댁을 드나들어야 하는 그로서는 영채에게 못을 박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영채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흥'소리를 내며 그를 흘겨보았다. "시예가 병이 있다고요? 무슨 병이 있단 말예요? 건강하게 보이잖아요?" "맞아. 물론 겉모습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아 그러나 자주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지. 예를 들면, 지난번 생일날도 여러 사람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층으로 뛰어올라간 적이 있어. 또 언젠가는 정원에서 산책하다가 갑자기 택시를 가로막고 서기도 했고."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사실 그 애는 병을 핑계로 경빈 씨와 가까워질 기회를 찾고 있을 뿐이에요. 내가 보기엔 경빈 씨도 그런 걸 전혀 모르고 있진 않은 것 같은데요." 경빈은 담 담하게 웃기만 했다. "난 모르겠는걸. 원래 난 멍청한가 봐." "미안하지만 나는 결코 멍청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잔재주를 부리는 건 딱 질색이라구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박힌 영채의 비난은 한순간도 경빈을 편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엔 이해와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왔다. 만일 이런 사소한 일로 오해가 생기고, 작은 오해까지도 남녀간의 애정 탓으로 돌려진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영채, 나는 그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인지 시예 씨를 두고 하는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만일 나에게 한 말이라면, 나의 인격을 걸고 맹세하건대, 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잔재주 같은 건 부리지 않아." 이 말에 영채는 잠잠 해졌다. 그녀는 그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결코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 표 정이었다. 경빈은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고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말 한마디 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말이 좀 심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정색을 하고 말해서 미안해. 그러나 이건 진심이라는 걸 알아줘. 나는 빙빙 돌려서 얘기하고 싶지 않아. 오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말은 그날 저녁의 실수를 이해해 달라는 것과 당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랑 하지 않는다는 거야." 경빈의 태도는 조금의 가식도 없이 매우 진지했다. 영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속눈썹에 맺혀있는 작은 이슬방울을 훔쳐 본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어 느 정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황철 규가 들어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도 쉽게 바꿀 수 있을 것이고, 제삼자 의 신분으로 중재자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철규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주 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영채는 음식을 들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눈 속엔 여전히 이슬방울이 서 려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빈 씨의 모든 말과 저에 대한 사랑을 믿어요. 그러 나 오늘 저녁엔 또 다른 약속이 잡혀 있고. 내일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집으로 찾아오진 마세요. 모레 저녁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하죠. 어때요?" "집에서 만날 수는 없단 말인가?" "요 며칠 동 안 제가 바쁘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모레면 괜찮겠죠? 이틀 동안은 저를 그냥 놓아두세요. 시예도 마침 병중이니 경빈 씨의 보살핌이 필요할 거예요." 경빈은 그녀가 평정을 되찾았다고 믿었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좋아. 모레 저녁 일곱 시에 여기서 만나기로 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채의 눈속엔 여전히 이슬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뭔가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겨우 손대기 시작한 음식과 함께 그 말들을 다 삼켜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음식은 얼마 먹지도 않았다. 마치 그를 위해 먹는 시늉이라도 내는 것 같은 태도였다.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다른 친구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봐 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그녀가 오해를 풀고 예전처럼 다시 명랑해질 수 있다면 자신은 그것만으 로도 만족한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영채가 떠난 후에 경빈은 잠시 더 앉아 있다가, 담수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에게 누구와의 약속인지 묻지 않았다. 또한 그녀가 철규를 찾은 이유가 단기 자기와의 문제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29 곽시예의 병은 염려했던 거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단지 감기로 열이 올랐을 뿐 다른 합병증이나 특별 한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구 원장은 며칠 동안 드나들며 그녀를 진찰하고 주사를 놓아주었다. 4일 째 되는 날 아침,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곽 사장 부인은 한결 마 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더구나 시예가 이젠 성민의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 걸 보고는 한시름 놓는 심정 이었다. 구 원장이 시예를 살펴보고 응접실로 내려왔다. 곽 사장은 함께 아침식사를 하자고 했으나 구 원장을 사양했다. "식사는 집에서 하고 왔습니다. 그저 얘기나 잠깐 나눌까요?" "그러죠, 일단 식탁으 로 갑시다. 좀 있다가 대북에 가서 할 일이 있거든요." 구 원장은 곽 사장이 아침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친근하게 물었다. "홍 사장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곽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이 틀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홍 사장이 투자를 하게 된다면 이번 난관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공장도 훨씬 더 발전하게 될 겁니다." "요즘 회사는 어떤가요? 요 며칠 동안은 서로 가 바빠서 함께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으니..." "홍 사장과는 협상이 잘 됐어요. 내가 광산 개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해외 진출 방안을 제출했더니 그는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더군요. 몇 군데 알아보 니까, 이미 장거리 전화로 홍콩 사무실 책임자와 이번 일을 상의했고 내 계획서를 그들에게 보냈다더군 요. 일단 그쪽에서는 도의를 한 상태고 구두상으로도 화답을 받았으니, 이제 홍콩에서 최후 결과만 보내 오면 곧 계약이 성사될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드물 겁니다." "그러나 계약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그러니 마음을 놓을 수 없 지요. 물론 지금까지 동업을 하면서 잘못되거나 나를 속인 적이 없어서 보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 만 그래도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닌 것 같군요." "곽 사장, 지금까지 쭉 잘해오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곽 사장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구 원장, 우리는 한 식구라 고 믿습니다. 원장님만큼 나를 장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년 동안 겉으로는 내색을 안 했어도 문제가 많았어요.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임용호 이사가 나를 대신해 적지 않은 문제를 잘 처리해 주었 다면, 원장님 역시 그 사람 못지않게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솔직히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고..." 구 원 장은 곽 사장의 말을 도중에 가로막았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우리는 한 식구라고 해놓 고 남처럼 취급하다니 섭섭하군요. 만약 우리 병원에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십니 까?" 이때 시예가 아래층으로 내렸왔다. 불덩이 같았던 열이 내렸고 몸도 많이 회복되었으나 얼굴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구 원장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좀더 쉬는 데 좋을 텐데 뭐하 러 내려왔니?" "배가 고픈걸요." 시예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배는 고픈데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네가 먹고 싶은 것은 아무거나 다 먹어도 좋아." 구 원장은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 런데, 가능하면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먹으려무나. 푹 자고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면 금방 나을 거다." "내일도 주사를 맞아야 하나요? 맞지 않아도 되죠?" 그녀는 희망을 담은 눈빛으로 구 원장을 바라보았 다. "오늘처럼 건강하다면 내일은 주사를 놓지 않으마."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녀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인사했다. 곽 사장은 서둘러 대북으로 가야 했고 구 원장도 병원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 가 있었기 때문에 곽 사장이 식사를 마치자 그들은 바로 일어섰다. 그녀가 식당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었지만 해야 할 얘기는 거의 다 나눈 뒤였다. 경빈과 함께 병원으로 가던 구 원장이 불쑥 물었다. "자네, 요 며칠 동안 영채를 만난 적이 없었지?" 구 원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경빈은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 며칠 동안 계속 못 만나다가 어제 저녁에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랬군." 구 원장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럼 몇 시에 헤어졌는가?" "아마 여덟 시쯤 되었을 겁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영채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먼저 나갔고,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곽 사장 댁으로 돌아갔습니다." 구 원장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동 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경빈의 모르고 있는 곤란한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경빈은 감히 그의 생각 을 끊을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원장은 또다시 물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자네가 집에 자주 전 화를 걸어 영채를 찾았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런데도 그 애를 만나지 못한 것 같더군. 그날 저녁 자네가 시예를 찾으러 나간 것 때문에 그런 건가?" 경빈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영채는 그날 저녁 에 제가 시예를 찾으러 간 일 때문에 화가 났었나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결되었습니다." "그 래?" 구 원장은 계속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 애는 그 일에 대해 나에게 말한 적이 없었고, 심지 어 어머니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네. 그래서 내가 얘기 좀 하려고 기회를 찾았는데, 요 며칠 동안 그 애가 집에 붙어있지 않아 얘기할 겨를이 없었어. 자네는 이제 잘 해결되었다고 하는데, 그 애 생각도 같 은지 모르겠군."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이번 일로 자네 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서슴없이 알려주게. 내가 그 애를 타이르겠네." "원장님, 저는 그렇게 하지 않 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은 제게 잘못이 있습니다. 만일 제가 먼저 영채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면 아 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자네는 어머니가 걔 때문에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줄 모를 걸세. 영채는 어 제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네. 헤어질 때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않던가?" 너무 놀란 나머지 경빈 은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채가 어때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디로 간 것 일까?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나 친구 집에서 머물렀을 겁니다." 구 원장은 더 이상 묻거나 말하지도 않았다. 원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경빈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곽 사장 부부가 딸이 집을 나갔을 때 애타게 찾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구 원장 부부의 심정도 그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채가 동아오지 않은 것 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친구 집에서 놀다가 그렇게 된 거겠지. 시간이 너무 늦 어 혼자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올 수 없었을 테고, 친구 집에 전화가 없어서 연락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구 원장은 더 이상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빈의 마음속엔 그 일이 더욱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영채는 평소의 모습 이상으로 그를 차갑게 대했으며, 헤어질 때 왠지 무슨 흥분을 감추고 있는 듯했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던 것이다. 그녀가 약속 때문에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디서 누구와 만나는 건지 물었어야 했다. 만일 그녀의 약속 장소를 알았더라면 그는 기다렸다가 그녀 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최소한 그녀가 있는 곳을 구 원장 내외에게 알려 줄 수만 이었어도 집에서 걱정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원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경빈이었다. 아직까지 특별히 맡 은 일이 없는 그는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항상 그날의 신문을 번역했고, 그리고 나서 다른 일을 찾았다. 그런데 오늘 신문에 난 기사 하나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제3면 사회란에 장경민의 기자회견 내용이 대 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는 상당히 긴 기사를 통해 작년 성탄절 이틀 전의 불행했던 비행기 추락사 고에 대한 해명을 했다. 사고의 진정한 원인을 폭로한 것이다. 그는 신문지상을 통해 두 가지 유력한 증 거를 제시했다. 그날 도원 공군기지의 기상증명서, 비행기 조종계통의 불량보고서가 그것이었다. 이 두 가지 증거는 진성민과 장경민을 비행기 사고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가 있었다. 장경민은 기자회견 중에 특히 병원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사실에 감사했고, 그의 병을 잘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용기를 준 것에 감사했다. 이러한 보도는 사고의 진정한 원인을 찾을 수 있게 했고 장경 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진성민으로 하여금 지하에서나마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경빈과 철규의 이름도 언급하면서 특히 경빈이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 기자는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장경민이 간신히 살아 돌아 왔을 때 그는 이미 조종계통의 불량을 알았으나 어느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장경민은 자신의 기술이 모자라서 결국 성민과 승객의 생명을 희생시켰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사고가 자기 한 사람의 책임이며 진성민과 회사의 책임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몇 사람의 보고로부터 알게 된 조종계통의 상황은 유능한 정비사가 시험해 봐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상황하에서는 누구라도 구출할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비행기의 기기가 고장인 걸 알면서도 성민은 왜 비행을 강행 했는지를 추궁하는 어떤 기자의 질문에 장경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성민은 훌륭하고 책임감 있는 조종 사로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회사에는 비행기가 없었고 승객은 표를 반환할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당일의 기상예보를 확신하고 항로에 특별한 변동의 징조가 없기 때문에 마 음놓고 이륙했다. 그는 당시 두 사람 모두 20여분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기후가 돌변 할 수 있고, 이와 같은 재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지는 않았다고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책임 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장경민은 마지막으로, 자신은 본래 기자회견을 가질 마음이 없었으 며 회사의 명예와 사업에 영향을 끼칠 생각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이런 상황 을 회사에 보고했으나 회사당국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마공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처벌하려 했 다. 그러므로 그는 부득이하게 사회에 진상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이것은 회사를 협박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복직을 원하거나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여러 사람들이 진상 을 확실히 알게 하여 아직 회사에 남아서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동료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 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에 기자회견까지 결심하게 됐다는 말까지 덧붙여졌다. 기 사를 다 읽고 난 경빈은 틀림없이 이번 기자회견이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다. 또한 많은 사람들 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강 주임이 아직도 사무실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한가 로이 기사를 읽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쾌한 면도 없지 않았다. 조경준과 장경민은 기자회 견을 갖기 전에 자신과 상의하고 동의를 먼저 구했어야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론 반대하 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먼저 알 권리가 있었고, 또 구 원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곧 병실로 가서 장경민을 찾았다. 간호사는 장경민이 어제 오후에 퇴원했다고 알려 주었 다. 경빈은 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회진중인 철규를 찾아 신문기사를 그에게 내밀었다. "철규 형, 형은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죠?" 철규는 힐끗 쳐다보았을 뿐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 래, 진작에 알고 있었어. 어제 오후에 알았지." "그런데 나는 지금에서야 기사를 보고 알았어요." 경빈 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드러났다. 철규는 경빈을 이끌고 병실을 나가면서 말했다. "너는 요 며칠 동 안 영채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었잖아.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어떻게 내가 장경민이 퇴원한 거 조차 모를 수 있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들이 너를 무시해서가 아니야. 어제 오후에 장경 민과 조경준이 나를 찾아왔더군. 병원 안을 여기저기 뒤지며 너를 찾아봤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하더 라. 나도 여러 군데 전화를 걸어봤지만 너의 행방을 찾지 못했어. 더군다나 그는 퇴원을 서둘러야만 하 는 사정이 있었어." "그러나 최소한 원장님에게는 장경민의 퇴원을 알려야 하는 거잖아요."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내 얘기를 들어 봐. 어제는 상황이 특별했어. 황급히 장경민을 찾아온 조경준은 강 주임 이 마공 쪽의 일을 알고 몇몇 직원들에게 비행기 추락 사고와 관련된 증명서를 철회하거나 회수하지 않 으면 해고시키겠다고 위협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더라. 그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만큼 시간이 워낙 급했기 때문에 장경민과 조경준은 어제 오후에 곧바로 퇴원수속을 밟고 신문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기자 회견을 청했지. 퇴원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병원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철규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에야 경빈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잘됐군요. 신문을 보다가 기사 를 읽게 되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오늘 너를 찾아올 거야. 병원에 와서 인사를 하겠다고 했거 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무튼 재미있겠군요." "그래, 일단 한번 기다려 보자구." "몇 시쯤에 온다고 했죠?" "아마 일찍 올 거야. 조경준이 오늘 오전에 장경민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니." "마침 잘 됐네요. 오전엔 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주경빈." 철규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어제 저녁엔 어땠니? 영채와 잘 풀린 거야?" "그럭저럭." 경빈의 얼굴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녀 는 대단히 화가 나 있었는데, 결국 나의 해명에 풀어졌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천만의 말씀. 형은 아직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 걸? 그녀는 직선적인 성격이라 화난 감정을 그때그때 털지 않으면 안 돼요. 하지만 뒤끝이 없어 오해가 풀리면 곧바로 잊어버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 철규도 안심하는 눈치 였다. 경빈은 아직도 의혹이 가시지 않은 부분에 대해 그와 상의하려고 했다. 영채가 자신에게 할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려다가 말았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 은 것은 절친한 친구의 초대가 있었던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미심쩍은 구석은 여전히 남았 다. 경빈은 이 두 가지 일들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고, 철규에게 사실대로 속시원히 털어놓고 상의하면 해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차피 이건 그와 영채 사이의 문제지 제삼자가 끼여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사무실 여직 원이 그를 찾아왔다. "주 선생님, 방금 사무실로 선생님을 찾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어디서 왔는데 요?" 경빈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곽 사장님 댁에서 급히 오셨으면 하시더군요." "네?" 경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건을 전한 여직원은 어느새 저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철규가 다급하게 외쳤 다. "경빈아! 빨리 서둘러라. 시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이?" 경 빈은 의아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황철규가 눈짓으로 신문을 가리켰다. 경빈은 비로소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철규가 그런 그를 급히 재촉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겠다. 그녀가 신문을 본 게 틀림없어.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몰라." 사무실로 향하는 경빈의 마음은 무척이나 초조했 다. 우선 구 원장의 차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으로 갈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여러 가지 사태를 염두에 두고 마음을 재촉했다. 그가 사무실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엔 조급했던 마음이 비교 적 안정되었다. 그날 벽담에서 시예가 한 말 속에 담겨 있던 죽음의 암시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전부터 성민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늘 신문을 보고 비록 큰 자극을 받았을지라도 심각할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이런 판단이 결코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곽 사장 부 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거의 신음하듯 외쳤다. "주 선생님이십니까? 빨리 좀 와주시겠어요?" "혹시 시 예 씨한테 오늘 신문을 보여 주셨습니까?" "그래요. 그 애는 계속 울면서 선생님만 찾고 있어요. 최대 한 빨리 좀 와주세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알았어요. 기다리겠어요. 애 아빠는 지 금 대북에 가서 찾을 수가 없어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부인의 목소리는 상당히 다급했 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는 마세요. 그다지 나쁜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대신 그녀가 밖으로 나 가지만 못하게 하시면 됩니다. 제가 도착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주 선생님, 삼십 분 내에 도착 하실 수 있으세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화기를 놓기가 무섭게 미연이 들어와 구 원장이 그를 찾는다고 전했다. 원장이 장경민의 일을 뒤늦게 알고 괜한 번거로음을 만들었다며 그를 책 망하려고 호출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전에 알지도 못한 그로서는 대단히 억울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 까 구 원장은 그를 보자마자 사태의 진상부터 물었다. 구 원장의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생각만큼 엄하지는 않았으나 구 원장은 보고서를 가리키며 추궁하듯 물었다. "자네는 이 일을 알고 있었나?" "방금 황 선배에게 얘기 듣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구 원장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재차 물었다. "그럼 황철규가 장경민을 퇴원시킨 건가?" 경빈은 조금 전에 철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 로 전했다. 구 원장은 그제서야 이해를 하는 듯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크게 잘못 처리한 일은 아니군. 책임을 추궁하려고 부른 게 아니고, 단지 황 선생과 그들이 부주의했다는 사실을 일러두고 싶은 걸세. 설령 어제 오후에 나와 자네가 없었더라도 기사가 나오기 전에 당연히 먼저 알렸어야 하지 않나." 구 원장의 지적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이 일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사전에 즉시 구 원장에게 보고 했을 것이다. 치밀하기로 소문난 황철규가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렇게 소홀히 한 것일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 같았다. "시예가 자네를 찾는다니 서둘러 가보게."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모님께 지금 출발한다고 전했습니다." "장씨 에게 차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해 놓았네. 차가 필요하면 계속 써도 좋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 니다. 도착하는 즉시 차를 돌려보내겠습니다." "만일 시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을 주게. 오전에는 병원에 있을 거니까." "잘 알겠습니다." 구 원장에게 인사를 건넨 경빈은 곧장 밖으로 나갔 다. 경빈이 나가는 사이에 구 원장은 미연에게 황철규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경빈은 분명 구 원장이 그와 함께 이번 일을 상의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장경민이 퇴원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번거로운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공개한 사실을 항공회사에서 승인한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법정까지 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 게 된다면 병원 역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했다. 30 곽사장댁에 도착했을 때 곽 사장 부인은 응접실에서 서성거리며 경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의 얼 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녀의 표정을 본 경빈을 바짝 긴장했다. "사모님, 따님은 어떻습니까?" "그 애는 계속 선생님만 찾다가 지금 잡들었어요. 저는 그 애 방에서 기다리다가 방금 차가 오는 것을 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어요." "별일은 없었습니까?" "우린 아무런 생각 없이 오늘 신문을 보게 했는 데 갑자기 울고 불고 난리가 난 거예요. 한마터면 기절할 뻔했답니다." "사모님, 매우 죄송하게 됐습니 다. 저도 어제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대북에 다녀오는 바람에 아무 것도 몰랐었습니다. 미라 알고 있었 으면 조치를 취했을 텐데 말입니다. "원장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분도 기자회견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셨대요. 아마 주 선생님도 모르고 계셨을 거라고 하더군요. 만일 알았다면 원장님에게 당연 히 연락했을 거라고요." "오늘 아침에야 원장님께 진상을 말씀드렸습니다." "방금 전하로 선생님이 출 발했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도 구 원장님이세요. 시예는 줄곧 선생님만 찾았어요. 아무래도 선생님께 무 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경빈은 생각에 잠기며 부인에게 물었다. "잠시 뒤에 올 라가 보겠습니다. 사모님께선 제가 어떻게 했으며 좋겠습니까?" "전들 특별한 생각이 있겠어요? 선생님 께서 몇 마디만 해줘도 그 애를 안정시킬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 말씀이라면 아주 잘 듣는 아이잖아 요."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경빈은 부인을 위로하며 몇 마디 덧붙였다. "너 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장경민의 치료를 맡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예 씨를 위해서였습니다. 아직 시기가 아닌 것 같아 미리 사모님께 알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진 선생의 죽음을 오랫동안 숨길 수도 없는 문제가 아니잖습이까. 필요하다면 진 선생의 친구를 찾아서 그녀를 만나게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 각했어요. 장경민이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이니 만큼 그로 하여금 진상을 알리도록 하는 게 가장 적합하 다고 느꼈습니다." "그 애는 이미 성민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글쎄요, 제가 미처 생각 하지 못했던 사실입니다만, 어쩌면 따님이 벌써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장경민과 만나 게 하는 것이 따님에게도 좀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이후부터 다시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 다." "그럼 이 신문기사를 본 것도 그 애한테 나쁘진 않다는 뜻인가요?"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 그럼 안심이에요." "사모님, 이제 올라가 보도록 하시죠."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올라갔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시예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그녀 옆에는 반쯤 젖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고, 신문도 눈물로 몇 군데 젖어 있었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창백한 뺨에는 온통 눈물자국이 번 져 있었으며, 눈썹 위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두 손은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는 마치 비를 머금은 한 떨기 배꽃 같았다. 경빈은 숨소리를 죽이며 문 곁에 서 있었다. 부인은 침대 곁으 로 다가가서 가볍게 그녀를 흔들었다. "얘야, 시예야!" 겨우 눈을 뜬 시예는 무척 쇠약해 보였다. 그녀 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선생님!" "시예 씨." 경빈은 침 대 곁에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어디 아파요?" 시예는 힘없는 눈길로 어머니를 한번 바라보고는 잡시 후 입을 열었다. "엄마, 저 성생님과 둘이서만 얘기 좀 하고 싶어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안심이 안 되는지 경빈을 바라 보았다. 그는 시예의 이마를 짚어 열이 있는지 확인하고 맥박을 쟀다. 그 런 후에 부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표시를 해 보이며 아무 일 없을 거니까 안심하라고 일렀다. 부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선생님도 오늘 점심은 여기서 함께 했으며 좋겠어요. 내가 두 사람의 음식을 준비할 게요." 그가 감사의 말을 전하자 부인을 곧바로 내려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방안은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계속 주시하는 시예의 눈빛이 그를 불안 하게 했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선생님을 불렀나요?" 경빈은 고개만 끄덕였다. 적당한 말을 찾아 이 사건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오늘 신문을 읽 었어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시예 씨!" 그는 조금 당황했다. "나 역시 이런 일이 생 길 줄은 미처 몰랐어요. 어제 오후에, 내가 병원에 없는 사이에 철규 형이 장경민을 퇴원시켰답니다. 나 도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신문엔 장경민을 치료한 사람을 주 선생님이라고 되어 있던데, 왜 내게는 말해주지 않았어요?" "속이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을 속일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적당한 기회를 봐서 말하려 했을 뿐이에요." "주 선생님도 다른 사람들과 마 찬가지로 내가 진상을 영원히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경빈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에 나는 시예 씨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중에서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대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죠. 그러나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말하는 그들이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구 원장님인가요?" "맞습니다. 만일 내 가 당신을 위해 모험을 할 생각이었다면 반드시 뒷일까지 고려해야 했었죠. 저는 사장님과 사모님이 당 신을 무척 사랑하신다는 걸 압니다. 만일 당신이 진상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들까지도 충격이 크셨을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요. 엄마는 심장병이 있기 때문에 자극을 받으시면 안돼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펐다. "당신이 건강을 회복한다면 부모님도 그만큼 좋아질 겁니다. 그래야 나도 안심이 되고요. 내 가 내 자신보다도 당신을 깊이 염려하고 있다는 걸 시예 씨가 믿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믿어요." 나 지막했지만 확신 있는 대답이었다. 경빈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이 제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방금 그녀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걱정한다고 다시 한번 고백했다. 늘 그의 마음속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그 자신도 놀 랐다. 자신이 진정으로 시예를 사랑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지금껏 이런 감정을 누구에게도 나타 낸 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벽담에서 그녀를 찾게 된 후부터 이런 감 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것은 그녀에 대한 관심을 넘어선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원 히 이 감정을 숨기려고만 들었다. 영채가 돌아오기 전에는 다만 도의적인 책임으로 그러한 감정을 억눌 려야 했다. 그러나 구 원장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제외하곤 영채가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이었다. 영채가 돌아온 후 그는 시예를 전과는 다른 감정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 음 한구석에서 터져나오는 새로운 감정이 그녀를 향한 속 깊은 사랑이었음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어쩐지 모순된 것 같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 몹시 혼란스럽고 곤혹스러웠다. 그는 남몰래 고민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끝 모르는 이 혼돈의 사랑을 어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이 미묘한 감정이 자라나도록 그냥 방치해둘 수도 없으며, 더 이상 진행시킬 수 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예가 완쾌된다면, 그는 곧 그녀를 떠나야 한다. 이후에 다시 만나도 그는 결코 특별한 존재로서 그녀를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상적인 대화나 나 누다 돌아가는 손님으로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시예는 여름날 비 갠 뒤에 나타나는 저 하늘 끝의 무지개처럼 금장 나타났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존재일 뿐이다. 단지 그 선명한 빛깔 만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을 과거형의, 혹은 미완의 불가능한 사랑...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녀 쪽 이었다. "선생님!" "아!" 그는 짐짓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 다. 시예는 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손으로 귓가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신문에 발 표된 것 말고도 장경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요." "글쎄요, 되도록이면 저도 모든 것을 알 려드리고 싶습니다만,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저도 병원에 와서야 그를 알게 됐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 병을 낫게 할 수 있었죠?" 경빈은 그녀의 청에 따라 장경민의 치료경과를 간략히 설명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사실상 큰 도움이 안 되었으며 주로 조경준 등 몇 사람의 도움이 컸음을 강조했 다. 그녀는 다 듣고 난 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 선생의 인터부 내용 중에서 선생님께 특히 고맙다고 했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아니군요. 선생님은 확실히 그를 위해 큰 힘이 되셨어요. 물론 그 사람 친구들도 수고했지만 주인공은 주 선생님이었어요." "아닙니다. 그가 마땅히 감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처음 그를 치료하게 된 동기는 바로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훗날 우연히도 그와 진 선생이 그 불행한 사건의 억울한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그를 치료하고 싶었고, 이번 기회에 그들이 부당하게 뒤집어쓴 오명을 벗겨주고 싶었어요." "저 역시 선생님께 감사드려요! 만 약 성민 씨가 하늘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는다면 그도 반드시 선생님께 감사할 겁니다." 경빈은 쓸쓸하 게 미소지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성민에 대한 질투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시예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여자와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고 죽은 후에도 사랑받는 행운의 사나이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죽었다 한들 무슨 원이 있을까 싶었다. 물론 이런 질투가 전혀 터 무니없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애인을 질투한단 말인가? 그는 상념의 꼬리를 무는 가운데 입을 열었다. "시예 씨, 만일 진 선생이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 다면 당신이 건강해지고 또 자신을 귀하게 여기길 바랄 겁니다. 어쩌면 그날 저녁에 진 선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저를 벽담으로 인도해서 당신을 찾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시예는 어느새 눈이 빨개져서 눈썹을 내리깔고 울먹였다. 공연한 말을 한 것일까? 슬픔에 잠긴 그녀의 모습은 그를 몹시 후회스럽게 만들었다. 그로서도 자신을 억제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성민의 이름을 운운하거나 그리워하는 내색을 하지만 않았어도 충동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을 지도 모른다. 이때 시예가 문득 그를 일깨웠다. "선생님, 빨리 장경민 씨를 만나고 싶어요." "예?" 경빈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 면 안 되나요?" "선생님은 여전히 저희 부모님들 때문에 신경을 쓰시나요? 어쩌면 제가 자극을 받을지 도 모른다는 그 노파심 말이에요." "아닙니다. 사실은, 걱정되는 부분이 좀 있어서요. 그 사람은 얼굴의 절반이나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거든요." "저도 알고 있어요." 시예 는 의외로 침착했다. "신문에서 그에 대한 기사를 읽었어요. 현재로선 그에겐 무엇보다도 우정어린 격 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난 결코 무섭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경빈은 감동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넓은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군요." "그렇다면 저를 위해 수 고해 주실 수 있죠?" "물론이죠. 틀림없이 약속할 수 있어요.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쯤은 그 사람을 이 리로 데려오겠습니다." 시예는 몹시 흡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고마워요. 바로 그 일 때 문에 오늘 제가 선생님을 꼭 만나뵙고 싶었어요. 생전에 성민 씨와 가장 친했던 친구하고 이야기를 나 누고 싶었거든요. 성민 씨에 대해 더 많은 일들을 알고 싶어요. 신문에서 장경민이라는 사람은 그와 오 랜 친구이자 동료였다고 쓴 기사를 읽는 순간부터 내내 그 생각뿐이었어요." "좋아요. 장경민이 제게만 알려준 비밀을 알려드릴게요. 진 선생이 생전에 갖고 있던 가방을 그가 보관하고 있는데, 진 선생의 유 일한 유품이랍니다. 아마 그는 그것을 시예 씨한테 갖다주려고 할 겁니다. 당신이야말로 그 물건을 받아 서 간수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싫어요. 정말 그런 물건이라면, 받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가져오지 말라고 할까요?" 경빈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에요. 전 이제 현실 을 받아들여야 해요. 장경민 씨에게 가져와 달라고 말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아요." 대답 을 마치자 그는 다소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죽은 진성민에 관한 이야기뿐이 었다. "그럼 좀 쉬다가 내려가서 시예 씨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점심식사라도 하면서 안심시켜 드리기 바랍니다." 시예는 억지로 웃음을 띠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엔 매우 고분고분하게 두 눈을 감았 다. 경빈은 일어서서 무한한 애틋함을 지닌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화롭게 두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이불 위에 얹은 채, 그는 발걸음을 옮겨 조용히 방 을 빠져나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자신에 대산 한숨인지, 그녀를 위한 탄식인지 알 수 없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래층까지 내려왔지만 그의 마음속은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그는 이 시각부터 자 신과 그녀가 멀어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곽 사장 부인은 아래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어두 운 표정으로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혹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몹시 긴장한 채 난간을 꽉 붙잡고 물었다. "그 애한텐 별일 없어요?" "괜찮습니다. 사모님." 경빈은 부인을 안심시키려고 급히 표정을 바꿨다. "따님에게 잠시 잠을 자라고 했습니다.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 애와 무슨 말을 하셨나요?" "뭐, 별다른 얘기는... 오늘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저는 그 애가 충격이나 받지 않았을까 걱 정돼요. 정말로 아무 일 없겠죠?" "사모님. 따님은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일은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저는 사실 장경민의 심한 화상 때문에 그녀가 놀라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따님 은 오히려 저를 안심시키더군요. 만일 이 일로 그녀가 무슨 영향을 받는다 해도 결코 건강을 해치는 일 은 없을 겁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부인은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가슴을 쓸어 내렸다. "시예 씨도 선생님을 믿고 있으니 저도 선생님의 판단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모님, 저도 사모 님과 마찬가지로 따님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그녀는 이미 완전히 회 복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젠 아무 염려 없습니다. 다만 몇 개월간 상심이 컸기 때문에 시간이 좀 필 요할 겁니다." "장 선생이 오실 때 주 선생님도 같이 오시는 거죠?" "물론이죠. 저도 꼭 같이 오겠습 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꼭 그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부인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걱 정거리가 해결되었으니 가슴속에서 천근이나 되는 돌덩이를 떼놓은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경빈 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직접 부엌에 가서 음식을 만들었다. 경빈은 구 원장 댁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유자가 전화를 받아 영채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곽 사장 댁에서 점심식사를 할 테니 자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전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31 이날 오후 천광열은 경찰서에 도착했다. 경찰에 체포된 것이 아니라 한 친구와 함께 자진 출두한 것 이다. 그 친구의 성은 방씨였다. 예전에 그가 건성화학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이자 곽 사장을 구타한 혐의로 해고된 사람이었다. 천광열의 곽 사장 폭행사건을 부추긴 것도 바로 그 방씨였다. 두 사람은 여 유 만만하게 택시를 타고 대북 경찰서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경관에게 가서 이름과 신분을 밝 혔다. 경관은 그들 두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누군지 알겠다는 듯 천광열을 쏘아보았다. "담수 병원 에서 전화가 왔는데 빨리 돌아오라더군." "전 돌아가지 않습니다." 쳔광열의 태도는 당당했다. "전 그 병원 원장의 속셈을 뻔히 알아요. 그는 멀쩡한 사람도 병신으로 만드는 사기꾼이에요. 난 정식 의사가 발급해준 건강증명서를 갖고 있어요." 경관은 그가 내놓은 서류를 한차례 훑어보았다. "그럼 여긴 뭣 하러 왔어요?" 천광열은 마음속으로 이미 각오가 된 듯했다. "난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 과정 에서 본의 아니게 어떤 의사 선생을 다치게 했어요. 그 일로 난 형사상의 처벌을 받아야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경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인 방씨가 나섰다. "이 사람 은 정말 무고합니다. 그는 원래 정신병원에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다만 건성화학 곽 사장의 비리를 알 고 있다는 죄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죠. 곽 사장이 정신병원과 짜고 이 사람을 그곳에 보내 격리시 키려 한 겁니다..." 경관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방씨라고 합니다. 이 사람의 친구지요," "이 친구는 저를 경찰서에 자수시키려고 데리고 온 겁니다.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요." 천광열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전, 경찰서에 자수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기화가 허락된다면 기자회견을 열어 회사 와 병원의 추악한 면모를 폭로하겠습니다." 그 다음날 몇몇 신문지상에 천광열의 사진과 그가 폭로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아마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그중 한 신문사는 유독 곽 사장의 일을 물고 늘 어졌다. 지면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이 사건을 대서특필한 기사내용은 특별히 곽 사장과 천광열간의 스캔들을 강조하였고 유리와 곽 사장이 술집에서 함께 있는 사진과 그녀의 주소를 실었다. 이는 마치 평온한 호수에 던진 커다란 돌처럼 거친 파문을 만들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구 원장을 신문기사를 경악의 눈길로 쭉 훓어보고는 곧 곽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곽 사장, 오늘 신문 보셨소?" "봤어요." 곽 사장은 난감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난 어제 저녁에 벌써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진작 나한테라도 알리지 않구요? 어떻게든 막 을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사정이 간단치 않아요." 곽 사장은 탄식을 내뱉었다. "구 원장도 알다시 피, 그들은 이제 본격적인 싸움을 걸어온 겁니다." "정말 미안해요, 곽 사장. 내가 일을 소홀히 한 탓에 생각지도 않게 이런 큰 일이 생겼군요." 곽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 원장, 그건 당신이 책임질 일 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어요. 이 사건 뒤에는 분명 음모가 있습니다. 모든 게 계획적이에요. 천광열은 앞에 나서서 큰소리치는 하수인에 불과하고 사실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구 원장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곽 사장의 얘기를 듣고 보니 뭔가 확실한 느낌이 들었다. 천광열이 도망친 뒤 이틀 동안 만약 혼자만 있었으면 일찌감치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에겐 돈도, 돌아갈 집도 없으며 그를 받아줄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당당하게 기자들까지 불러낼 수 있겠는가? 상세한 서면보고와 사진 역시 천광열 혼자만의 역량 으로는 능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투가 천광열 의 막후에서 그를 조종한다는 겁니까?" "아직 명확한 증거가 없어요. 단지 예감이 그렇다는 거죠. 배후 가 있다면 제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겠죠." "그렇겠군요. 신문에 보니까 천광열을 데 려온 방모라는 사내 얘기가 있던데 당신이 예전에 해고한 공원이었답니다." "그 역시 하수인에 불과하지만 천광열에 비해선 중요한 일면이 있어요. 제 추측으로 중요한 막후 인물 은 나와 동종업자 같아요. 홍콩 쪽의 투자를 쟁취하려다 실패한 사람 중의 하나겠죠. 나에 대한 복수심 으로 이런 신출귀몰한 수단을 생각해 내서 맞서려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은 내 사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곽 사장도 기자들을 불러놓고 진상을 해명하시죠. 우린 수중에 아주 유력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잖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이 일이 내 문제에 대해 얼마나 도움을 줄지 회의적이에요." "교포 자본 투자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겁 니까?" "그렇습니다. 난 지금 곧바로 공장으로 가서 임 이사와 대책을 찾아보겠어요. 근로자들의 동요 를 진정시키고 홍 사장에게 일의 내막을 해명해야겠죠. 그리고 나서 기자회견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 다." "생각에 우리 두 사람이 공동으로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도 좋을 듯 싶은데요. 곽 사장 이 자료를 갖춰서 나랑 같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곽 사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 다. "그럽시다.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오후 세 시에 기자회견을 하기로 합시다. 우리 두 사람이 나가서 천광열의 그거 없는 비방을 낱낱이 해명합시다. 그리고 배후의 문제는 그에 따른 방식으 로 해결하도록 합시다." "좋아요.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정오에 내가 다시 전화를 드릴테니 자세한 내 용들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괜히 바쁘신 분을 성가시게 만드는 것 같군요." 구 원장은 수화기를 내려놓 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그는 병원 안의 몇몇 주요 책임자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아울 러 파트별로 전화연락을 취하고 오후 3시 이전에 기자들을 병원으로 데려와 정식으로 회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천광열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천광열이 도 주한 그날 오후에 성이 방이라고 하는 친구가 그를 만났고 둘이서 장시간 밀담을 나누었다는 것이 아무 리도 미심쩍었다. 그 밀담은 반드시 도주 노선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단언하긴 어려우나 방씨는 저녁에 담장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도망쳐 나온 천광열을 은신처로 데려갔을 것이다. 구 원장은 이로써 의외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곽 사장이 말한 막후 인물의 책략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중 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병원 내방객의 방명록에는 방씨의 직업이 '아주화확'의 기능공으로 적혀 있었다. 이 회사는 구 원장도 잘 아는 곽 사장의 라이벌 회사였다. 곽 사장의 회사와는 상품 판매노선이 서로 같은데다가 공교롭게도 곽 사장이 예전에 해고한 사람이었다. 대충 사건의 실마리가 잡혀갈 것도 같았 다. 황철규와 주경빈 두 사람도 신문을 보고 몹시 곤혹스러운 기분이었다. 비록 배후의 문제가 더 심각 하다는 걸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만으로도 사실 엄청나게 큰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두 사람은 심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어찌됐든 이 사고의 주요한 원인은 자신들로부터 비롯되 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천광열이 아직도 격리된 병실에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겠는 가? 그들이 좀더 깊은 내막을 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결코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 도 곽 사장과 임진희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곽 사장이 스스로 화 를 자초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상황은 간접적으로 그들 수 사람도 천광열이라는 못된 놈의 졸개로 몰아가고 있었다. 신문에는 그들 두 사람의 이름도 실려 있었는데 어쩌면 그건 천광열의 진심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기자들에게 두 사람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행히도 그들 두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 로 격리된 병실에서 나와 비로소 '암흑세상에서 벗어나 광명을 되찾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 에 발린 말 한 마디가 결코 두 사람을 기분좋게 하지는 못했다. 이제 그들은 무슨 면목으로 곽 사장과 시예를 볼 것인가? 두 사람은 고민 끝에 구 원장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일단 사죄를 한 다음에 해결방 법을 구해 볼 생각이었다. 사건이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으니 필시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구 원장은 조금도 질책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곽 사장과는 벌써 얘기가 됐네. 이 사건은 두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어. 책임질 일도 없고." "아닙니다. 모든 게 저희들 불찰이었습니다." 철규는 송 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곽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지 않으면 저희는 더욱 괴로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사건의 진상이 판정나지 않은 상태라서 저희들이 특별히 원장님께 청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십시오." 원장은 일단 황철규의 말을 수긍하는 기 색을 보이며 담뱃재를 털었다. "사실 나도 그 문제로 두 사람을 만나보려고 했다네, 나와 곽 사장은 오 후 세 시에 기자회견을 자청해서라도 이 사건의 진상을 깨끗이 밝히기로 결정했네. 우리 병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을 겸해서. 두 사람은 꼭 참석해서 기자들에게 천광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도 록 하게." "알겠습니다." 철규가 대답했다. "천광열에 대한 조치는 마땅히 병원의 결정이었다는 점을 증언해 주게. 두 사람이 그자의 퇴원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면 돼. 솔직히 병세 가 호전될 기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격리 치료실에서 보통병실로 옮겼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병원의 기본 입장이기고 하고." "알겠습니다." 경빈의 대답이었다. "저도 물론 원장님 생각에 동의합니 다. 천광열도 아마 그 점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 선배와 저의 이름을 거론했을 겁니다." "그는 이용만 당하는 사람이야. 병원 역시 그들에겐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 은 곽 사장을 파멸시키는 거야." "저희도 기사를 읽고 그런 눈치를 챘습니다." 경빈의 말이 끝나자 곧 바로 철규가 말을 이었다. "원장님, 천광열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그가 단순히 자신의 오명을 씻기 위 해 그런 짓을 한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곽 사장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장님은 자세한 내막을 알고 계십니까?" "맞아. 잘 봤네. 완전히 곽 사장의 라이벌 업자가 이 틈을 타서 그를 파멸시키려는 거라네. 곽 사장은 지금 합작 투자를 교섭중인데 상대방이 파괴공작을 펼치고 있는 셈이지." 철규와 경빈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말 이 없었다. 경빈은 심중이 매우 복잡했다. 그는 곽 사장 댁에 기거하며 건성화학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어는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곽 사장이 이 회사를 위해 적지 않은 출혈을 감수했다는 사실도 알 고 있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회사에 투자할 정도로 열성적인 사업가였다. 그럼에도 최근에 상품의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곳곳에서 사고가 터졌다. 경영상태도 이미 수세에 빠져 유지가 쉽지 않았다. 교포 투자를 교섭중이라는 얘기는 그도 들은 바가 있다. 비록 자세히는 모르지만 곽 사장이 이 합작 투 자에 대해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뜻밖에도 이 중요한 시점에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비록 상대방이 악의적인 의도에서 곽 사장을 파멸시키려 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만약 천 광열이 없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적어도 경빈 자신과 철규는 이러한 음모에 휘말려 상대방 에게 이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사건은 터져 있었고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었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곽 사장의 전화가 왔다. 구 원장은 손으 로 수화기를 막으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럼 모두 나가보게. 급한 일이 생기면 다시 찾을 테니." 경빈과 철규는 잠자코 원장실을 물러나왔다. 구 원장은 곽 사장의 화급한 음성을 듣고 일이 이미 틀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나간 걸 확인하고는 다시 수화기에 대소 말했다. "곽 사장입니 까? 무슨일이죠?" "틀렸어요!" 곽 사장의 절망적인 한마디였다. "그러면 우리 만나서 다른 방도를 모 색해 봅시다." 구 원장은 곽 사장의 음성만으로도 사정이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길게 얘 기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곽 사장은 잠시 망설인 후 말을 이었다. "나는 곧 대북에 가야 하는데, 약속 장소를 어디로 정하면 좋을까요?" "점심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실 수 없습니까?" "사정이 급박해 요. 곧 가봐야 됩니다. 미안하지만 구 원장이 이곳까지 나올 수만 있다면..." "좋아요, 제가 곧 가죠." 구 원장은 곽 사장이 편한 대로 일정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구 원장은 전화를 내려놓고 곧바로 직원들에게 오후의 기자회견에 관한 준비 상황을 점검하게 하고 몇 가 지 필요한 사항을 지시했다. 그는 늦어도 오후 2시 30분까지는 병원으로 돌아올 작정이었다. 지시를 끝 낸 후 그는 곧 건성화학으로 향했다. 그는 곽 사장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막 다른 골목에 이르렀는데도 구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도 공장의 경제사정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 다. 가령 홍콩 측의 자본유치에 실패한다면 공장은 곧 중대한 난관에 직면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력 을 기울여 이 오랜 친구를 지원하리라 마음먹었다. 곽 사장은 그가 충분히 믿고 지원해 줄 수 있는 유 일한 사람이었고, 아울러 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점을 훤히 알고 있었기 에 곧바로 건성화학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한 구 원장은 이사 방으로 들어갔다. 곽 사장과 임 이사가 묵묵히 마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상황이 안 좋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곽 사장이 굳이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우리 서로 힘을 합해 해결합시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야 하는 게 진정한 친구 아닙니까?" 곽 사 장고 임 이사의 안색은 매우 침울했다. 곽 사장은 구 원장의 몇 마디 확실한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 였다. "구 원장을 속일 생각은 없어요. 사실 구 원장이 이번 일을 도와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 면..." "일단 홍 사장 쪽의 상황부터 말해 보세요." 곽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로선 상당히 비 관적입니다." "투자하지 않겠답니까?" "어제 상담은 아주 좋았어요. 홍 사장은 오늘 나와 계약서에 서 명하기로 약속까지 했었구요. 그러나 오늘 돌연 홍콩 쪽에서 전보가 안 왔다는 핑계를 대며 이틀만 기 다려 달래요."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구 원장이 위로했으나 곽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 교활한 늑대는 나한테 못할 짓을 했어요. 어제 저녁에 그의 대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홍콩에서 이미 나에 대한 투자에 동의했다더군요." 임용호도 한몫 거들었다. "그러나 사정이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홍 사장에게 우리 자본을 확인하지 못하면 일주일도 못 간다는 걸 잘 알고 있 다면 기껏해야 나흘일 텐데, 기다렸다가 우리대신 뒷수습이나 하려는 거죠." 구 원장은 고개를 돌려 임 이사에게 물었다. "공장의 재무구조는 어때요? 부분적이나마 나도 조금은 지원할 수 있어요. 곽 사장과 나는 친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난 총력을 다해 최대한 공장을 가동시켰으면 합니다." 임 이사는 구 원장의 말만으로도 감격했다. "안 그래도 공장은 몇 개월 전부터 줄곧 불황이었어요. 생 산품은 판로가 막히고 자금회전도 잘 안 되고, 게다가 투자가를 끌어들이기 위해 임시로 대부를 받아 시설까지 확장했어요. 첫째는 우선 홍콩으로부터의 투자로 채무를 갚고, 동시에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 이..." "말을 끊어서 미안합니다." 구 원장은 다급히 물었다. "홍 사장이 계약서에 서명했더라도 돈은 며칠 내로 오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사장님도 거기에 대해선 이미 준비를 해두셨습니 다. 주거래은행에 계약서를 근저당 잡히고 대부받는다면 별 어려움 없이 해결이 됩니다." "이번 주중에 필요한 자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휴!" 임 이사가 곽 사장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가 말없 이 보고만 있자 곧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두 장의 어음이 만기가 됩니다. 내일은 공장직원들에게 월 급을 줘야 되고요. 우리가 부지런히 빌리러 다닌 덕에 사소한 비용은 모두 지출할 수가 있어요. 문제는 이틀 두 몇 장의 어음이 만기가 되어 돌아올 때부터 시작될 것 같습니다. 대략 계산해 보아도 오억 원 가량이 필요합니다. 이전에는 통상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던 일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이 일차어음이 상대방의 손으로 들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만기일을 늦추지 않을 것이고 사장 님도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테니까요." 구 원장은 이번 사태를 올바르게 수습할 하나의 계략을 생각해놓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이 곽 사장의 생사와 관련될 것이며 상대방은 그가 파멸하기 전에는 결 코 손을 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구 원장은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곽 사장을 도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오억 원은 매우 큰 돈이라 나도 지금 당장 이렇게 많 은 현금을 갖고 올 수 없어요. 그러나 아직 며칠은 여유가 있으니 대책을 세워봅시다. 지금 우선 내가 일억 원짜리 수표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당신들 거래 은행으로 가서 대부해 달라도 담판합 시다. 난 나의 병원 재산을 근저당 설정하고 그들에게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그 한 장의 계약서 따위와 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구 원장은 말을 마치고 가방을 영어 수표책을 꺼냈다. 그가 서명을 하기 위해 만년필 뚜껑을 여는 모습을 보고 곽 사장은 그를 만류했다. "구 원장, 난 진심으로 감격했어요. 만 약 나에게 지금 이 돈이 없다면 나흘 후엔 곧 은행의 부도처리로 상대방이 우리 공장을 접수하러 올 겁 니다. 그러나 나는 공연한 일로 구 원장까지 어렵게 만들 수 없어요." 구 원장은 가볍게 웃으며 곽 사 장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곽 사장, 이 무슨 말입니까? 그 동안 쌓아온 정을 보더라도 내가 이러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을 거절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임 이사 가 말했다. "사장님. 일단 구 원장님의 호의를 받아들이시는 게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이 위기를 잘 넘기고 새로운 상품이 나올 때를 기다리면 저쪽에서 더 이상 해코지를 하지 못할 겁니다.." 구 원장은 수표를 꺼내 이서한 수 임 이사에게 건네주었다. "홍 사장이 이번 문제의 진 위가 가려진 이후에 다시 결정하길 바라니 우리도 그를 나쁘게 보지 맙시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그를 상대로 합작 문제 같은 건 거론하지 맙시다. 우선 우리는 오늘 기자회견에 대한 연구부터 합시다. 이미 신문에 보도된 내용 때문에 모두들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테니 이럴 때 진상을 공개하자는 겁니다." 임 용호 이사는 수표를 받은 후 한숨돌린 기색이 완연했다. 공장 안의 경제상황은 곽 사장보다 그가 더 밝 았다. 그는 자금 회전상의 모든 어려움도 잘 파악하고 해결하였다.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제가 우선 은행으로 가서 이 돈을 예치시키겠습니다. 그래야만 급한 자금을 변통할 준비를 할 수 있고, 다시 찾아서 오늘 중으로 월급을 지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방법이군요." 구 원장은 흔쾌 히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마친 후 곧 돌아와서 우리가 함께 은행으로 가서 대 부받는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임 이사는 구 원장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먼저 갔다. 곽 사장은 땅이 꺼져라 탄식하고 있었다. 그를 보면 '영웅은 심약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 는 화공학을 배운 학자였는데 이 공장을 설립할 때만 해도 원대하게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만 대단했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하의 험악한 풍랑은 생각도 못했었다. 요 몇년 동안 그는 거친 기업경쟁에 대 해 많은 걸 배웠지만, 오늘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풍악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약 구 원장이 사생결단의 전력으로 그를 돕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구 원장은 곽 사 장의 이러한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곽 사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우정어린 미소를 보냈다. "우리 기자회견 이야기나 합시다." 그는 곽 사장이 공장 일에 온 신경이 곤두서서 기 자회견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으리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간 준비된 내용을 곽 사장 에게 알려준 후 오후에 다시 세세한 상황에 대해 상의하기로 했다. 곽 사장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그 자신 공장의 기본 문제는 결코 해결책이 없다는 걸 명백히 알지만 구 원장이 이렇게 자신의 병원까 지 담보로 내놓은 마당에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땐 자신뿐 아니라 구 원장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구 원장의 도움을 극구 사양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도 끝내 그 호의를 거 절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곽 사장으로 선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 다. 앞으로는 자기 공장 뿐만 아니라 구 원장의 병원 문제까지도 모두 그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물론 단기간 내에 문제가 해결된다면야 무슨 걱정이겠는가. 32 구 원장이 대북에 갔을 대 조경중이 장경민을 데리고 병원에 왔다. 경빈은 그들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장경민은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조경준을 따라 들어왔다. 이발을 해서인지 정신도 또렸해 보였고 눈빛이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는 감격한 눈으로 경빈을 보았다. "주 선생님, 제가 퇴원할 때 마침 안계셔서 인 사도 못 드리고 갔습니까. 너무 바빠서 오늘에야 겨우 시간을 내서 왔습니다. 작은 선물 하나 가져왔는 데..." "아닙니다." 경빈은 선물 소리가 나오자마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일은 나의 천직이에요. 나 도 장 선생이 이렇게 완쾌되어 무척 기뻐요. 그리고 장 선생이 신문에다 나에 대한 과찬의 말씀을 하셨던데 그것만으로도 벅차요." "정말 선생님 의 도움이 켰어요. 누가 뭐가 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만약 주 선생님이 없었다면 전 최악의 상태 에서 최상의 상태로 돌아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전 소중한 생명을 다시 얻었을뿐 아니라 누명도 벗었어 요. 저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런 것으로나마 제 마음의 만 분의 일이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장경민은 유리로 된 상자 안에 든 금방패를 꺼냈다. 금빛이 찬란한 이 방패에는 윗면에 받는 사람과 기증하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선물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지나친 감이 있었다. 경빈은 부담감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받을 수가 없었어. "아, 너무 귀한 선물이군요. 난 더더욱 받을 수 없어요." 장경민은 미소를 짓고는 담배를 꺼내 두 사람에게 권했다. "주 선생님은 내가 감사를 표하는 게 싫으 십니까? 제가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 이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강 주임에게 갔었습니다. 친구는 내가 이 미 다 나았다는 사실을 알렸죠. 그리고 회사에서 사람을 보내 내 퇴원을 도와줄 것과 다시 회사에서 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선생님 생각엔 강춘부 그 노인네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습니까?" "그 는 절대 복직이 불가능하다고 했겠죠. 맞습니까?" "왜 복직할 수 없다고 했을까요?" 조경준이 이어 말 했다. "강 주임은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이렇게 말했어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장경민이 병원에서 죽는 거야. 만약 그가 퇴원한다면 법원에서 반드시 그를 감옥에 처넣겠지'라고 말입니다. 선생님 천하에 이런 부도덕한 사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가 한통속이 되어 자기를 속인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경빈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결국 우린 먼저 자구책을 쓰는 수밖에 없었습 니다. 우선 강 주임을 꼼짝 못하게 하고 회사의 선제 공격을 면하기 위해서 기자회견을 자청했고 정식 으로 회사에 소송을 제기했어요." "저도 그 회견 기사를 읽었어요.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것도 잘 압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회사의 반응은 매우 좋았어요. 당국은 정식으로 조사단을 파견했고 마침내 증거를 찾아 냈습니다. 그 결과 경민이의 복직 승인을 얻어냈어요. 내일 신문에는 회사측의 공식성명이 실릴 겁니다." "아, 아주 잘 됐군요." 경빈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장경민의 두 손을 모아쥐었다. "당신의 최후 승리에 축하를 보냅니다." "그러면, 주 선생님 부디 저의 작은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복직이 되 었고 월급도 사고 당시까지 소급해서 받았어요. 그래서 돈이 조금 생겨 이런 선물로나마 내 마음을 표 시하고 싶었어요." "좋아요, 받지요. 그러나 이건 병원을 대표해서 받는 것입니다. 선물은 마땅히 병원 에 보관해 둘 것입니다." "그러나..." 장경민이 말을 하려는 것을 경빈은 불쑥 가로막았다. "만약 계속 고집피운다면 난 받지 않겠어요." 장경민과 조경준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경빈의 의견에 동의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경빈이 짓궃게 웃었다. "강 주임도 심기가 편 치 않았겠어요. 이럴 때 그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군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을 겁니다." 조경준이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는 완전히 맥이 빠져서 사장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어요. 듣기로는 회사에서는 이미 그의 사직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경빈은 문득 웃음을 멈추었다. "그 노인네도 어지간히 불쌍하게 됐군요." "맞아 요, 알고 보면 그 노인네도 매우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 본토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악 랄했어요. 그런 사람은 영원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경빈은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저녁에 조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공교롭 게도 외출중이시더군요. 마침 두 분이 이렇게 찾아와주셨으니 다행입니다. 사실 두 분을 좀 귀찮게 할 일이 있거든요." "예?" 조경준이 즉시 물었다. "선생님께서 무슨 일로 우릴 찾았습니까?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시죠." "이런 말 하기엔 좀 뭣하지만 곽시예 씨가 장 선생을 한번 만나 보고 싶어해서요. 그녀는 당신들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그 일은 그녀의 병으로 봐선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만, 지금 그녀는 장 선생을 만나서 직 접 진 선생의 일을 들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좋아요." 장경민은 곧 바로 경빈의 제의를 받다들였다. "그럼 언제 가는 게 좋을까요?" "오늘은 시간이 어떻습니까?" 장경민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 더니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경빈은 그가 왜 망설이는지 알 수 있었다. 불에 탄 반쪽의 얼굴이 그 녀에게 충격이 될까 봐 내심 꺼려하고 있을 터였다. 경빈은 부드럽게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장 선생의 신상에 대한 것을 대충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갈 의사만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환영할 겁니 다. 전에 한번 조 선생을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식사한 적도 있어요." "좋습니다. 제 생각엔 오늘 오후 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이 기회에 성민이 남긴 가방을 갖다 주는 게 좋겠군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오늘 오후엔 제가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병원에서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인데 제가 꼭 참석해야 합니다. 일단 그녀와 통화해서 상의해 보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의 동의를 얻자 경빈은 시예와 통화를 했다. 그녀는 장경민이 성민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릴 듣고는 더욱 애타게 기댜렸다. 경빈은 오후 4시 30분에 장경민이 가방을 가지고 그녀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해 주 었다. 그리고 천광열의 일로 오후에 병원에서 기자회견이 거행되기 때문에 그는 장경민과 함께 동행할 수 없다는 말도 엇붙였다. 그녀도 사정을 이해하고 더는 이유를 달지 않았다. 대신에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 싶어했다. 경빈은 자기가 아는 대고 성의껏 답해 주고는 그외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경빈은 잠시 깊은 생기게 빠졌다. 시예는 그녀의 모친이 신문에서 곽 사장에 대한 기사를 읽고 는 충격을 받아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고 했다. 만약 충격이 심 하면 발작할 가능성도 있었다. 경빈은 바로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이 사건으로 부인의 심장병이 재발되기라도 한다면 그의 죄책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현 상황만으로도 그는 이미 막중한 부 담을 느끼고 있는 처지였다. 만약 장경민의 일이 시예한테 충격을 주게 되면 천광열의 일에 더하여 곽 사장에게 큰 곤란을 가져다 줄 것이고 천광열의 일에 더하여 곽 사장에게 큰 곤란을 가져다 줄 것이고 그는 정말 그들 일가를 대할 면목이 없어질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철규가 와 있었다. 경빈은 장경민과 조경준에게 통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방금 통화했는데 곽시예 씨가 장 선생을 무척 기다리고 있어요." "언제 가면 되나요?" "오후 네 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그녀와 장 선생은 아직 초 면이요? 제 생각엔 조 선생이 함께 가시는 게 좋을 듯한 데..." "그래야죠." 조경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 선생님은 함께 가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때 철규가 끼어들었다. "경빈아, 방금 네가 전화하러 나가고 없을 때 여기 두 분이 오늘 꼭 우리에 게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구나. 그래서 내가 네 대신 사양했다." "고마운 마음 잊지 않겠 습니다." 경빈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덧붙여 말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바빠서 어쩔 수 없군요. 다른 날 시간 있을 때 다시 두 분과 함께할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난 네가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철규는 물론 영채와의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낮엔 시간을 낼 수 있을 테니 내가 너 대신 대접할께." "철규 형." 경빈은 철규를 일깨우듯이 말했다. "형도 오후에 기자회견이 있다는 걸 잘 알 고 있잖아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서..." "물론 난 알지." 철규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이었 다. 그는 기자회견 문제라면 이미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다는 투로 덧붙였다. "신경쓸 것 없어. 그건 오 후의 일이잖아. 지금 곧바로 나가면 된다구. 너한테 알려줄 일도 있고." 경빈은 철규가 무슨 심가로 저 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설마 이 큰 일을 잊고 있지는 않으리라 믿었기에 함께 식사하러 가 기로 했다. 이미 철규가 약속을 정한 일이었고 경빈은 한사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는 일부러 구실 을 마들어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는 철규를 따라갔다. "경빈아." 철규가 여유있는 표정으로 웃었다. "넌 아마 나한테 무슨 말로 욕을 해줄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경빈은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형을 욕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무슨 꿍꿍이속으로 날 이렇게 궁금하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요. 오는 나가서 사람들과 식사하실 거죠?" "내가 급히 너를 찾고 있는데 두 손님과 담화중이라고 하더구나. 나 는 누군 줄도 모르고 갔는데 그들이 와 있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어." "무슨 일로 찾으셨는데요?" "미연 씨가 네 장모의 전화를 받았는데 어디 마작판에라도 다녀온 모양이로군. 사모님께서 문득 딸의 얼 굴을 이틀 동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나 봐. 그래서 전화를 걸어 '호랑이'원장과 네가 없는지 찾 아보라고 했겠지. 사모님은 미연이한테 우리 두 사람더러 대북에 가서 영채를 찾아보라고 전달해 달랬 다는군." "난 영채를 찾을 방도가 없어요. 원래 그녀의 친구과도 별로 친하지 않고요. 그녀가 어디로 갔 는지 알아야지요." "밥이나 먹자.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없어. 오후 세 시까지만 돌아오면 돼. 그때까 진 찾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넌 저녁에 영채랑 약속이 되어 있으니 어차피 만날 테고, 그때 네가 집으 로 데려 가면 문제는 끝나잖아." 경빈은 만족한 듯 웃어 보였다. "형은 정말 대단해요. 두뇌도 명쾌하 게 잘 돌아가고." "빨리 가보자. 손님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 조경준과 장경민은 차를 몰고 왔다. 철규와 경빈까지 타자 자리가 꽉 찼다. 조경준이 운전을 해서 넷을 대북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경빈 의 머리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곽시예의 병을 돌보랴, 천광열의 성가신 문제에 시달리랴, 자꾸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영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녀는 왜 이틀동 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친구의 집에 있다면 틀림없이 전화를 걸어 집 안사람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틀 전 저녁에 헤어지면서 그녀는 다 만 한 가지 약속만 했을 뿐 어디로 간다는 말이 없었다. 그도 당시엔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녀의 기분이 약간 들떠 있다는 기색만 눈치챘을 뿐이다. 당시 그는 그녀가 자기 말에 감동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줄로만 생각했다. 잘못 보기라도 한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까? 구 원장은 그녀를 끔찍히 사랑했고 가급적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었다. 원장 부인은 마작을 제외 하고는 다른 일에는 흥미가 없어서 딸과는 전혀 충돌이 없었다. 아울러 영채는 작은 일이라도 부모를 속이는 경우가 없었다. 아무래도 모든게 의문 투성이에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는 또 생각했다. 원장 부인은 영채와 경빈 사이에 오해가 생겨 감정이 그리 편치 못하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런 까닭에 딸이 없어진 걸 알고도 크게 걱정하는 기색없이 경빈에게 그녀를 찾아오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속사정 을 구 원장 부부에게 시시콜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대체 어딜 가서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 문제는 그가 영채의 친구들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동경에서 돌아온 후 함께 몇몇 친척집에 가긴 했었지만 그녀는 질색을 하고 돌아왔었다. 결국 그 몇 군데엔 가지 않았으 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가 어디서 그녀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는 다만 할 일을 다하고 기다릴 뿐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별로 큰 걱정거리가 못되었다. 오늘 저녁에 만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갈 심산이었다. 그 자신도 그 리 타당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녀의 정혼자로 인정하고 있는 마당에 이틀 동안이나 집을 나가 행선지조 차 묘연하다는 것은 그로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원장실로 가 이미연에게 장경민의 선 물을 건네주며, 만약 구 원장이 그를 찾거나 부인이 대북으로 오라고 하면 3시 전에 반드시 돌아올 예 정이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영채의 일은 전혀 언급하기 않았고 미연 역시 묻지 않았다. 그가 즐겁지 않은 일은 언급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미연도 잘 알고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난감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미연은 그녀에게 구 원장이 3시나 돼야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제서야 그들 제 사람은 같은 차로 대북으로 갔다. 그는 심사가 뒤틀려 재미있게 이야기 할 흥미를 읽었다. 철 규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여전히 떠들면서 웃어댔다. 역시 그는 타고난 낙관론자였다. 기자회견 때도 그 는 모든 걸 명확히 밝힐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모르고 있던 사실은 이 일이 곽 사장의 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기칠 수도 있다는 것과 이 일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33 곽 사장과 구 원장은 함께 은행으로 가서 융자 신청을 했다. 은행측과의 상담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일반적인 원칙상 은행에서는 담보조사를 해본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지 그 자리에서 결정하는 건 불가능 했다. 다행이도 곽 사장은 신용 상태가 양호한 데다가 재산상으로도 문제될 게 없었기에 예외가 적용될 수 있었다. 은행측은 그에게 우선 융자부터 해주고 나서 천천히 수속을 밟아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 이 건 바로 곽 사장이 원했던 바였다. 바쁜 일이 일단 끝나자 구 원장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곧 현금을 은행으로 송금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사를 하면서도 그 들은 각 신문사로 나누어 전화를 걸어 기자회견이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제 시간에 사람이 오 지 않아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다. 2시에 구 원장은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최후 점검을 마쳤다. 곽 사장은 돌아오는 길에 잠깐 집에 들었다. 아침에 그는 신문을 보던 채로 놔두고 구 원장과 통화가 끝난 뒤 곧바로 나갔다. 그때 부인과 딸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후 반나절 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집에 전화해서 해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부인에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만약 유리와 공장의 위태위태한 사정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고르 라고 한다면 그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는 집에 들어서면서 분위기부터 살폈다. 집안은 의회로 고요했 다. 양금이 그를 맞으면서 모자와 상의를 받아 들었다. "집사람은?" "사모님께서는 대북에 가셨어요." "언제 갔는데?" "점심 드시고 바로 가셨어요. 사모님은 머리가 아프시다며 아침나절에 계속 누워 계시 다가 점심 때 겨우 일어나시긴 했는데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국만 조금 드셨어요. 원장님께 전화드렸는 데 대북에 가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얼마 후 사모님은 그리고 가셨어요." "대북에 왜 가는지는 말이 없 었어?" "중앙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셨겠죠, 뭐" "양금은 곽 사장은 힐끔 쳐다보았다. "사모님은 안색이 무척 안 좋으셨어요." 그는 몹시 긴장했다. 부인은 필시 신문을 보고 받은 충격때문에 대북에 간 것이 뻔했다. 그녀는 증세가 가벼울 땐 구 원장을 찾지만 심각한 상태일 땐 중앙병원으로 갔다. 유명한 내과 전문의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소파에 앉았다. 양금은 곧 차를 끓여 내왔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시예는?" "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편지?" 곽 사장은 깜짝 놀랐다. 그는 딸이 또 진성민에게 편지를 쓴다고 단정지었다. 그것은 바로 병의 징후였다. 그러나 곧 양금의 망을 통 해서 자신의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알아차렸다. "친구에게 편지 쓰는 거예요. 어떤 친구와 이번 주에 대 북에 놀러가기로 약속했는데 언니는 별로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아." 그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데 사장님. 언니가 그러는데 오후에 손님이 찾아올 거라고 했어요. 저더러 응접실을 깨끗이 치워놓고 차를 좀 준비해 두라고 하던걸요?" "누가 오는데?" 양금은 그의 반문에 고개를 저었다. "누 군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무척 기다리는 것 같던데요." "언제쯤 온다는 말은 없었나?" "대략 네 시쯤 오실 거라고 했어요." 곽 사장은 손님에 대해서 전혀 짚히는 바가 없었으나 경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 다. 그는 오후에 있을 기자회견 때문에 시간도 없을 터였다. 사실 요즘 들어 그는 경빈에게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딸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에게 깊이 감사해야 옳은 일이었으나 곽 사장은 그가 부질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걸 매우 즐겨하고 나서길 좋아한다고 느꼈다. 장경민의 일로 경빈의 이름이 신문에 오 르더니 천광열의 기자회견에도 또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지금의 일이 궁극적으론 경빈의 탓은 아 니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떨떠름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쓸데없이 남의 일 에 간섭하지만 않았어도 천광열은 아직 병실에 격리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를 이용해서 이런 소동을 일으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는 곧 2층으로 올라가 시예한테 누가 올 것인지 물어보 고 싶었으나 금세 마음을 바꿨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내일 신문에 그의 항변 이 실리게 되면 가족들도 모든 걸 이해하게 되리라. 그러면서도 내심 참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유리의 일이 신문에까지 보도된 이상 왠지 딸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그는 중앙병원에 전화를 걸었으나 공교롭게도 부인의 주치의가 부재중이었다. 부인이 병원에 왔는지 안 왔는지조차 확인 할 수가 없었다. 기자회견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양금에게 일렀 다. "난 구 원장의 병원에 좀 갔다와야겠다. 대략 네 시에서 다섯 시면 일이 끝날 거야. 만약 사모님한 테 전화가 오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병원으로 연락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곽 사장은 아무래도 마 음이 놓이지 않았으나 시간이 없어 차를 타고 급히 담수로 갔다. 일단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은 차라리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요 신문사 기자들이 모두 참석할 정도로 일반인들의 관심도 온통 그 사건에 쏠려 있었다. 공장의 노동자, 술집 여자, 정신병원 등이 관련된 사건이니 만큼 처음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전날 천광열의 폭로내용이 워낙 엄청난 것이어서 사람들은 자연히 흥 미를 갖고 이쪽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곽 사장은 어느덧 뉴스 속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가 서면보 고를 막 마치고 난 후 기자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질문을 해댔다. 질문의 초점은 자연히 유리와의 관계 에 집중되었다. 한 기자가 물었다. "사장님은 천광열의 폭로 사실을 완전히 부인하는 겁니까? 임진희 씨와의 관계도 전혀 사실무근입니까?" "그 점은 보고 중에 이미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곽 사장이 답 변했다. "산부인과 의사의 진단서가 가장 유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 진단서를 왜 천광열이 처음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는 제출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제출했어요. 당시의 법원과 경찰서에는 모두 기 록되어 있습니다. 공장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고요. 그러나 난 천광열의 자존심을 위에 신문에 공표하 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기자는 더욱 날카롭게 추궁하는 질문을 던졌다. "두 가지 의문사항이 있는데, 사장님은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곽 사장은 묻는 말에 즉각 대답했다. "사실 술집이란 데가 공 개적인 사교장고 아니겠습니까? 난 절대 그런 것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도 술집에 손님을 초대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술집에 나를 초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사진은 확실히 사람을 협박하기 위한 것 같군요. 내 생각으로는 천광열이 찍은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도 이런 술집이 어떤 곳인 줄은 대충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게다가 이 사진이 뭐, 결코 특별히 다정해 보이 는 건 아니잖습니까?" 곽 사장의 마지막 말은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그 기자가 또 질문을 던졌다. "그럼 유리 양과는 근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뜻인가요?" 질문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곽 사장의 답변에 비해 궁색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손님과 술집 여자와의 관계지요." "그러면 사장님은 근본적으로 동거설을 부인하는 겁니까?" "이 점에 관해선 앞으 로 경찰 측이나 기자 여러분들께 확실히 밝혀드리겠습니다. 난 이미 변호사를 선임해서 고소할 준비를 했어요." "사장님, 제가 듣기론 과거에 유리 양을 도와준 적이 많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왜 다시 호스티 스 일을 했을까요?" "제가 그녀에게 도움을 줬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녀에겐 부양가족도 많고, 또 집안 형편도 어려웠습니다. 전 공장 직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름대로 도움이 돼주려고 노력해 왔습니 다. 제 말이 의심스럽다면 공장에 와서 어떤 직원에게라도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유리가 술집에 나간 건 다만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건 여러분이 그녀를 직접 만 나 아시게 되겠지요." 그 기자는 다소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나 그 성이 방이 라고 하는 사람과 천광열은 모두 사장님 회사의 직원이 아니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 할 수 있어요." 곽 사장은 간단히 말했다. "천광열의 일은 이미 서면자료를 통해서 충분히 제 입장을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알고 싶은 사항이 있으며 담수 경찰서의 조서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겁 니까. 그들이 얼마나 흉폭하고 게으르며 파렴치한 인간들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큰 고통 끝에 해 고까지 결심하게 됐는지를 말입니다." 기자는 질문의 요지를 다른 쪽으로 바꾸며 곧 말했다. "사장님 은 아까 그 사진이 천광열이 찍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음모가 있다는 말 씀이군요. 세간에 떠돌기로는 이 사건은 라이벌 회사와 당신간의 대결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사실입니 까?" "제 생각으로는." 곽 사장은 기침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경쟁사회에서 남의 미움을 사는 경우는 불가피합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난 그런 추측 이 사실이 아니길 원합니다. 이 사진은 외국에서 온 친구를 접대했을 때의 것인데 당시 천광열은 병원 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그 사진을 주었 는지는 천광열에게 물어 보시면 알 겁니다." 곽 사장은 계속 이어지는 몇 개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 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간단한 질문이었다. 질문에 악의가 느껴진다거나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기자들이 공장의 현황을 질문했을 땐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선전까지 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질문 은 '공장이 문을 닫을 위기에 몰린 것이 사실인가?'였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답변했다. "오히려 반대입 니다. 난 얼마 전에 설비를 확충하고 내부를 정돈했어요. 이따가 여러분이 가서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 다." 곽 사장에 대한 질문이 일단락된 후 사람들이 관심은 구 원장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또한 어렵지 않게 기자들의 질문들에 대처할 수 있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구 원장님께 묻겠습니다. 천광열 은 당신을 사기꾼, 도둑놈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글쎄요. 난 다만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입니다." "천광열은 병원과 당신에 관해 말하면서, 그가 곽 사장에게 원한을 가지자 곽 사장을 도와주 는 차원에서 원장님이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당초 천광열은 경찰서에서 이리로 넘겨질 때 이미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진단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병원은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법원의 조치가 내려진 환자를 치료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그 는 그런 상황하에서 나에게 넘겨진 겁니다." "그러나 천광열의 건강진단서에는 아무 이상이 없던데요?" "선생, 만약 필요하다면 나도 오늘 중으로 그의 건강진단서를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이 말은 폭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다른 기자가 이어 물었다. "당사자는 만약 두 젊은 의사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오늘까 지도 격리 병동에 수용되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원장은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확 실한 것은 그들 두 의사가 나에게 병실을 옮겨 치료하자고 건의했다는 겁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이백여 명이 있는데 각각 담당의사들에게 맡겨서 치료합니다. 내가 모든 환자들에게 일일이 다 관심을 가질 수 는 없기 때문에, 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지요. 병원 안에서 병실을 옮기는 건 일상적인 일입니다. 모든 의사는 자기 스스로 알아서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환자에 대해서도 절대 임의로 퇴원여부를 결정할 순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의사는 주임의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지요. 우리 병원에선 어떤 환 자라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아요. 이 점은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원장님, 가령 경찰에서 천광열 을 다시 보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만약 그가 도주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그를 퇴원시키자고 경찰에 통지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그를 지극히 공평하게 대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 그는 병원에서 곽 사장에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난 결코 또 다시 그 격리 병실 로 보내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도망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기자들은 구 원장의 설명에 매우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어 구 원장은 간단히 병원의 상황을 소개하고 난 후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며 병원을 견학시켰다. 사람들은 병원의 상황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한 듯했고, 그러고 나서부터는 태도도 아주 부드러워졌다. 병원 참관을 끝낸 후 그 들은 건성화학을 견학하러 갔다. 구 원장도 함께 갔다. 그러나 경빈과 철규는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 이 떠나자 경빈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 오늘 기자회견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곽 사장과 구 원장은 누 명을 벗었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의심도 풀어준 셈이다. 어떤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내보이는 것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는 이 기자회견으로 사람들이 다 시는 곽 사장과 천광열의 과거지사를 문제 삼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사건의 진상은 이미 백일하에 드러 났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영채가 생각났다. 정오에 넷이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헤어진 후 몇 군데 찾 아보긴 했으나 영채의 행방은 알지 못한채 기자회견 시간 때문에 급히 돌아왔었다. 기자들이 공장으로 떠나자 비로소 저녁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이틀 동안 어딜 갔었는지? 무수한 의문과 회의가 밀려들었다. 이때 철규가 그의 생각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경빈아 너 시예씨한테 안 가 볼 거니?" 비로소 장경민이 그녀의 집에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시계를 보니 이미 5시였다. 그 들은 아직 그곳에 있을까? "글쎄, 두 사람은 벌써 시예 씨를 만나보고 집에서 나가지 않았을까?" "전 화를 걸어 봐, 귀찮게 왔다갔다 할 필요 없이." "귀찮은 것까지야 없지." 경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 다. "그녀의 병은 다 나았어." "그리고 너의 임무도 끝났고." "끝났지." 그는 왠지 허탈한 표정을 지 었다. "이곳에 돌아온 후 난 많은 걸 배운 느낌이야. 그것은 학교 다닐때도 군에 있을 때도 배우지 못 했던 교훈이었어. 이제 곽시예의 문제가 일단락 되었으니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마음잡고 일을 시작할 예정이야. 다시는 이런 한가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구." "경빈아. 너 퍽 감개무량한 것 같구나." "맞아, 난 아주 감개무량해. 아마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거야. 오늘에야 나는 그 동안 배운 게 무척 많다는 걸 느꼈어." "그건 그렇다 치고. 두 노인네가 조금 전 기자회견을 잘 치렀다고 생각하 니?" "그럴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많은 걸 배웠어." "마음이 강해진 거냐, 아니 면 소심해진 거냐?" "철규가 웃으며 물었다. "둘 다 아냐. 엄밀히 따져보면 약간 냉정해졌다고나 할 까." "좋아졌구먼." 철규는 잠시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정색을 했다. "솔직히 난 네가 너의 개성을 지켰으면 한다. 위선자가 되면 너나 나나 다를 게 없어. 장래 넌 이 병원의 주인이 되어야 하니 까. 반드시 너만의 확실한 주관을 갖고 있어야 이 병원이 다른 곳과 달라질 수 있어." 경빈은 철규가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왜 갑자기 이런 얘길 꺼내는지 이해가 안 되 었다. 그는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철규를 바라보며 한숨을 토했다. "철규 형, 형을 속일 생각은 없 어. 난 지금 아주 평범해지고 싶어. 평범한 의사의 길을 가고 싶어. 공부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 말 고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경빈아. 오늘 일로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어. 너도 보다시피 두 노인네 가 이 사건을 얼마나 잘 해결했냐? 물론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어. 그러나 이 일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 이 아냐. 지금껏 계속돼 왔고, 현재로서도 아직 끝났다고는 할 수가 없어." "난 형의 생각에 동조할 수 없어." 경빈은 철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왠지 오늘 두 노인네의 심정은 아주 착잡할 거라고 느꼈어. 더군다나 곽 사장의 태도는 마치 중대사를 치르는 것 같았다구.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두분 다 몹시 상심하셨을 거예요. 난 그게 걱정돼. 그런데도 난 조금도 도울 힘이 없으니." 철규는 침묵을 지 키던 중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넌 이번 일로 괜히 머리 쓸 필요가 없어. 정 할일이 없으면 재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영채와 약속한 곳으로 가보라구, 지금 너에겐 그게 더 중요 한 일이니까." 경빈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한테는 그 일이 더 중요하겠 죠. 그런데 왠지 예감도 별로 좋지 않고 마음도 너무 복잡해요. 아무래도 뭔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데 형이 함께 가주실래요?" "허튼 소리." 철규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나더러 들러리 노릇이나 하라구?" 경빈은 사뭇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확실히 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그 이 유를 알 수 없었다. 34 경빈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영채를 만나는데 그렇게까지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는 철규와 사무실 밖의 복도에서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6시에 대북으로 가는 차가 있는데, 기다렸다가 그 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6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에 미연이 급히 나오더니 경빈에 게 전화가 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경빈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했다는 것인가? 구 원장과 곽 사장은 기자들과 함께 저녁 먹으려고 대북으로 갔을 것이고, 구 원장 부인은 오 후부터 마작에 빠져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시예가 틀림없다. 시예는 그가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걸 모 르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곽 사장 댁에서 온 전화였다. 그러나 시예가 아니라 양금이었다. 왠지 불 안했다. 양금이 왜 전화를 했을까? 양금은 경빈이 목소리를 듣자 몹시 다급한 기색이었다. "선생님, 빨 리 오세요. 언니가 안 좋아요." 경빈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시예 씨가 왜?" "언니가 방에 서 기절하셨어요. 선생님 빨리 오세요!" "사모님은?" "사모님은 안 계셔요. 대북에 가셨거든요. 집안에 는 언니와 저 둘 뿐인데. 전..." "좋아. 내가 곧 가지. 넌 빨리 공장으로 전화해서 사장님께 이 사실을 알려라. 만약 안 계시면 전화 받는 사람에게 급히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고." "알았어요." "그리고 이층 으로 가 언니 곁에 꼭 붙어 있어. 내가 곧 갈 테니." 경빈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복도로 뛰어가 철규를 잡고 말했다. "시예가 또 기절했대요. 형 나 좀 데려다 줄 수 있지요!" "무슨 일로?" 철규도 무척 놀 란 기색이었다. "나도 몰라요. 지금 집안엔 아무도 안 계셔요. 양금이 급히 전화를 했어요. 우리 오토바 이로 빨리 가요." "좋아. 잠깐만 기다려. 가서 오토바이를 꺼내올 테니 넌 진료 가방을 가지고 오라구." 철규가 급히 차고 안의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 경빈은 서둘러 뒷자리에 올라 함께 탔다. 오토바이는 쏜 살같이 도로로 나갔다. 경빈은 마음이 조급해져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곁에 좀더 빨리 못 가는게 안타깝기만 했다. 장경민이 가고 난 후 그녀는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사전에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만약 그가 오후에 함께 갈 상황이 못 되면 다른 시 간을 택해 장경민과 함께 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경민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만약 그가 함께 갔더라면 반드시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중간에서 적당해 대화를 제지시켰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빨리 가서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퇴근시 간 때라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뛰어서라도 단순에 그녀에게로 가 고 싶었다. 실제로 장경민은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다. 조경준이 미리 그에게 부탁했었고 나름대로 주의 를 했었다. 사고 당시 상황은 대충대충 넘기면서 단지 성민이 살아 있을 때의 에피소드와 그들이 함께 하던 시절의 이야기만 했다. 시예는 차분한 태도로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간혹 한두 마디 말로 성민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마지막에 장경민이 감사의 뜻으로 한마디했다. "곽시예 씨, 오늘 난 당신을 만나 매우 기뻤어요. 당신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중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겠습 니다. 그리고 여기 성민이가 지니고 있던 가방을 가져왔는데, 이게 그가 남긴 유일한 유품입니다. 다른 여행용 물건들도 있었지만 그건 이미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내 생각에 이 가방은 당신이 보관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기 가져왔어요." 시예는 그 가방을 보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장 선생 님, 이거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장 선생님은 성민 씨에게나 나에게나 너무 잘해주셨어요. 그런데 혹시 장 선생님은 이 가방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계세요?"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가방을 열 어본 사람이 없었거든요." 장경민이 말했다. "이 가방은 줄곧 내 가방과 함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성민의 것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리고 사고가 난 뒤에 그걸 열어본 사람도 없어요. 병원에서 퇴 원할때 회사에서는 성민의 유품을 나한테 주었는데 그 중에는 몇 개의 열쇠도 있었어요. 솔직히 안에 무엇이 들었나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예 씨만이 유일하게 이걸 열어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가져온 겁니다." "감사합니다." 시예는 열쇠를 받아들었다. 열쇠는 그녀의 기분을 더욱 침울하게 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안에 어떤 귀중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열어 봐도 괜찮을 지.." "그렇게까지 귀중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줄 물건이라면 생전에 나한테 귀 띔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 세 사람이 여기 모였을 때 열어 보는 게 어때요?" "지금 그럴 시간이 없는데, 이를 어쩌죠?" 장경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친구는 여섯 시부터 근무해야 하 기 때문에 지금 급히 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우린 이만 일 어나겠습니다." 시예는 그들의 일에 지장을 줄까봐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대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 녀는 그들이 차를 타고 가는 걸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양금에게 가방을 자신 의 방으로 옮겨놓게 한 후 혼자 그 앞에 앉았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가방을 쳐다보았다. 손에 열쇠를 갖고 있었으나 그녀는 도저히 가방을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방은 성민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 었다. 비록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성민이 물건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가방 속의 물건은 성민에 대한 생생한 추억을 불러일으켜 그녀로부터 다시금 아픈 상처 가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서 그와 함께 보낸 날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 내 그녀는 용기를 내서 열쇠로 상자를 열었다. 오랫동안 잠가놓은 까닭인지 그녀가 긴장한 탓인지 그 녀의 진을 다빼고서야 그 가방은 드디어 열렸다. 안에 든 물건은 몹시 너저분하게 섞여 있었고 값비싼 물건은 없었다. 공군에서 수여한 훈장과 표창장 그리고 약간의 기념품과 함께 군복을 입고 찍은 몇장의 사진도 들어 있었다. 사진속의 모습은 무척 늠름해 보였다. 그리고 비행복을 입고 기내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녀는 몇 장의 사진을 훑어보다가 잠시 멍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사진은 그녀로 하여금 깊은 곳에 있던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어느덧 추억의 늪에 빠져 들어갔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가방의 다른 쪽을 뒤져보니 편지가 첩첩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편지는 그녀가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 녀는 손으로 편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홍콩에서 부쳐온 편지였다 섬세한 필체만으로도 한눈에 여자의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망설였으나 꺼내 보지는 않았다. 다시 뒤적여 보니 모두 스물세 통의 편 지가 나왔다. 모두 같은 주소지에서 동일인이 보낸 것들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느껴졌다. 과연 누가 이 편지를 보낸 것일까? 그에게 홍콩에 친구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많은 편지 를 보낸 것일까? 결국 그녀는 편지 한 통을 꺼내보기로 결정했다. 한 통의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그녀 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연이어서 다른 편지를 펼쳤다. 편지봉투 속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져 나 왔다. 그녀는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채 탁자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양금은 밖에 있다가 시예가 지르는 비명소리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급히 뛰어 들어왔다. 시예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시예를 안아서 침대에 데려다 눕히고는 경빈에게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다. 이 모든 사실은 경빈 과 철규가 양금의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었다. 비교적 경험이 많은 철규는 그녀의 맥박 을 짚어본 후 강심제를 주사하고는 응급치료를 했다. 경빈은 양금에게 대강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가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보기엔 보통 어행가방이었다. 하지만 개봉된 편지를 보고는 왜 그녀가 졸도를 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진은 진성민과 한 젊은 여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여인은 광동 사람 같기도 하고 동남아 일대의 여인 같기도 했다. 여인은 성민의 팔을 끼고 있었고 성민은 두 살 가 량 된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품에도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는데 성민과 꼭 빼닮은 남 자아기였다.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여인은 성민의 아내이거나 동거하는 여자일 것이다. 사진의 배경은 전부 다 홍콩시내의 모습이었다. 시예는 그에게 깜빡 속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 가 가정이 있다는 걸, 더군다나 아이까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고 그로 인해 병까지 생겼다. 너무도 그를 사랑했기에 그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상처도 깊어 결국 정신병까지 앓 았는데 알고 보니 정작 장본인인 성민은 그녀를 속였다. 그건 바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그를 사랑한 여자가 어떻게 그를 의심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 는가? 그녀는 이 사진과 편지를 보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와 충격으로 기절한 것이다. 경빈은 몹시 분개했고 그녀만큼이나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이 사진을 당장 태워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이 애정사기꾼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시예는 워낙 마음이 약한데다가 자신이 그토록 기대했던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자 이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호흡이 매우 미약해져 있었으며 희미한 눈 빛으로 넋을 잃은 채 경빈을 쳐다보았다. 철규도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철규를 바 라보고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경빈은 가방을 닫고 침대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불 렀다. "시예 씨"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아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것 좀 치워주세요." " 무얼 치우라고?" 경빈의 물음이었다 철규가 급히 그 가방을 가리켰다. 시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저 가방을 보고 싶지 않아요." 비록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녀는 엄청난 기력을 허비하는 것 같았다. 말을 마치자 숨이 찬 듯 가슴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경빈은 가방을 문 밖으로 가져갔다. 철규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고 온화하게 말했다. "당 신은 절대 다시는 흥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안정을 취해야 돼요." 시예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 았다. 경빈은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철규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시간이 다 되었어." 경빈은 몹시 곤혹스러웠다. 시예를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녀를 두고 가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채와의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 다. 시예 한테 양해를 구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영채와 약속이 있다고 말하고 가면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시예 앞에서 영채의 이름 을 말하기 꺼려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결심을 굳혔다. 그녀에게 이 일을 설명하고, 철규에게 곽 사장이나 부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녀를 지켜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시예씨, 난..." 시예는 갑자기 무엇 에 놀란 듯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 다. "경빈 씨!" "여기 있어요" 경빈은 더 이상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 다. 그는 급히 다가가 가볍게 양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려왔 다. "전 무서워요, 제발 가지 마세요." 경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시예 는 비로소 마음을 놓은 듯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눈을 감았다. 경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철규가 계 속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일단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영채가 또다시 그에게 화를 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그녀가 화를 내더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시예가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데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그녀에게 어떤 불행이 생긴다면 그 는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을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철규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형이 가보는 게 어때요?" 철규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잘 판단해라, 넌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난 시예 씨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형이 나 대신 잘 얘기해 주세요. 만에 하나..." 그는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턱으로 시예를 가리켰다. 철규는 그의 뜻을 잘 알았고 눈앞의 상황을 이해했 다. 경빈은 확실히 갈 수가 없었다. 시예가 설마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마음이 이미 너무 쇠약 해져서 자살할 기회를 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도 경빈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안심이 됐다. 철규는 경빈의 약속 장소에 자기가 가기로 결정하고 나지막이 일렀다. "내가 먼저 갈 테니 상황을 봐서 너도 오도록..." 경빈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도 가능하면 가보도록 할게요." 철규는 일어나서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방안에는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 후 창 밖에서 오토바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시 예는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이 말을 나눌 때도 그렇고 철규가 나갈 때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경빈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심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 다. 그는 가만히 시예를 들여다 보았다. 얼굴엔 핏기가 전혀 없었고 손도 차가웠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충격이었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빈의 머릿속엔 영채의 일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이틀 동안 어디 갔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였다. 영채는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건지?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저녁에 영채와 만나면 모든 걸 알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시예에게 갑자기 또 일이 생긴 것이다. 아무튼 요 며 칠은 모든 게 혼돈 그 자체였다. 드라마 같은 일이 한건 한건 쉬지 않고 벌어졌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곽 사장 부인도 집에 없다. 부인은 워낙 외출을 잘 안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어딜 갔단 말 인가? 이 또한 예사롭지 느껴지진 않았다. 창 밖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7 시 10분이었다. 철규가 지금쯤은 영채를 만나고 있으리라. 시예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진작부터 손이 저려왔지만 놓을 수 없었다. 차츰 그녀의 손 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한참 후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아마 곽 사장은 급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필시 그의 부인이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남자 혼자 처녀의 침대 곁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난처하던 참이 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놓았으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히 잠 이 든 것이다. 조용히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가방이 아직 문 밖에 있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그때 마침 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 급히 재촉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심각한 발자국 소리는 곽 사장이 급히 돌아왔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35 곽 사장은 만찬석상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구 원장과 함께 기자들을 대동하고 공장을 시찰시킨 후 곧 대북의 음식점으로 가서 저녁을 먹으려는 참이었다. 그가 막 자리를 앉으려고 할 때 공장에서 전화 가 걸려왔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빨리 돌아와 주셨으면 한다는 전갈이었다. 그는 부인이 대북에 간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러므로 설마 급한 일이 딸의 병 때문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때 이미 경빈은 양금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곽 사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구 원장에게 그 문제를 상의하였다. 구 원장은 계속 남아서 손님들을 대 접하고 곽 사장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만일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다시 전화로 구 원장에 게 연락하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 앉은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바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금이 현관에서 그를 맞으며 말했다. "중앙병원에서 방금 전화가 왔는데 사모님이 그곳에 계시대요." "주치의가 뭐라고 하든?" 곽 사장은 아주 긴장한 눈치였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었어요. 사장 님이 귀가하시면 전화를 걸어 달라고만 했어요." "시예는?" "주 선생님과 황 선생님이 오셔서 주사를 놓아 주셨어요." "두 사람 다 여기에 있나?" "주 선생님이 언니와 함께 있어요." 곽 사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응접실로 걸어들어가면서 물 었다. "시예는 좋아졌어?"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생각지도 않던 주경빈이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소파 부근에 서 있었다. "시예 씨는 잠이 들었습니다." 곽 사장은 경빈을 힐끗 쳐다보고는 담배를 꺼냈으나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는 경빈을 대하는 감정이 몹시 언짢았다. 연속적인 사건을 끊임없이 그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다. 장경민의 일은 시예로 하여금 병이 생기게 만들었고, 천광열의 일로 인하여 그는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부인은 화가 나서 병원에 가고, 시예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부인 의 병도 급한 병이나 아닌지 걱정되었다. 곽 사장은 이 모든 것이 주경빈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했 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쾌감을 경빈에게 퍼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코 나쁜 뜻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닐 터에 곽 사장 자신의 체면상 그렇게 속좁은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는 곽 사장 앞 에서 경빈은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천광열의 일이 곽 사장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 주었으리라 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고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 수록 스는 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두 사람의 마음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들어차 있었지만 경빈은 곽 사장보다 마음이 더 복잡하고 초조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일분도 채 안 되는 침묵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경빈은 숨막히는 침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정작 내뱉은 말은 엉뚱한 얘기였다. "사장님 시예 씨의 병에 관해서..." 곽 사장은 갑자기 그의 말을 막으며 격하게 소리질렀다. "자네는 더 이상 애쓸 필요 없네. 이제부터는 상 관하지도 말게." 경빈은 너무 놀라 더듬거렸다. "전... 전, 다만 생각하기론..." "해명할 필요 없네. 난 자넬 원망할 생각은 없으니까. 구 원장과도 상의가 됐네. 자넨 병원으로 돌아가 일하게. 그 동안 수고 많았네." 경빈은 곽 사장이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에 말은 나오지 않고 얼굴만 붉어졌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사장님, 저도 사장님이 근래에 무척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 일에 대해선 저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사장 님을 의도적으로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아, 이미 알고 있으니 돌 아가도록 해. 구 원장에게 들으니 영채와 약속이 있다면서." 경빈은 지금이야말로 해명할 기회라고 생 각하면서도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는 곽 사장도 지금 결코 마음이 편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러면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만, 시예 씨는 단군간 병원에 있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나의 일이야. 자넨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곽 사장은 참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알겠습니다." "왕씨." 곽 사장은 입구에가 대고 소리를 질렀다. 왕씨가 곧 응접실 입구에 나타나자 그는 바닥의 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왕씨에게 말했다. "주 선생님 가실 때 저 가방도 들도 갈 준비를 했다. 경빈은 몹시 흥분했다. 곽 사장이 완전히 자신을 쫓아내라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곽 사장은 곽 사장대로 가 장이 경빈의 것이라고 여겼다. 상황이 이렇게 돌변하자 경빈이 물러날 궁리나 하고 있었다고 판단해서 화가 더 났던 것이다. 시간이 촉박했고 상황은 경빈에게 더 이상 해명할 여우를 허용치 않았다. 경빈은 왕씨를 막으며 곽 사장에게 말했다. "이건 제 가방이 아닙니다. 이 가방으로 인해 따님은 병이 생긴 겁 니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사장님께서 이 안의 물건들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그리고 호의는 고맙지만 절 데려다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는 따님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경빈의 음성은 자기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일이 이렇게 우습게 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1분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 돌아서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곽 사장 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사장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몸을 돌려 문 밖으 로 나가자 왕씨가 그곳에 서 있었다. 곽 사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주 선생님을 모셔 다 드려라." 그러나 경빈은 끝까지 사양하며 휘적휘적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곽 사장은 혼자 응접실 에 남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들을 되씹어 보았다. 이 가방이 경빈의 것이 아니고 시예를 발병하게 만 든 원인이라니. 그러면 가방을 누구의 것인가? 어떤 물건이 들어 있길래 딸이 주사까지 맞아야 했단 말 인가? 그는 가방을 열여 보았다. 우선 그의 관심을 끄는 것들은 위에 놓인 편지와 사진이었다. 그는 사 진을 훑어본 다음 편지를 대략 읽어 보았다. 그는 곧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가방을 가지고 2층으로 올 라갔다. "이 상자는 누가 가져왔지?" 양금은 곽 사장을 힐끔 보고는 긴장하긴 했지만 그다지 화가 난 표정은 아니어서 안심하며 말했다. "오후에 두 손님이 가져오셨는데요." 시예가 이 안의 물건을 보았 단 말이냐?" 양금은 그날 오후에 발생한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곧바로 경빈에게 연락했더니 달 려와서 응급치료를 해주고 곽 사장이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 곁에서 간호했다는 사실까지 덧붙였다. 곽 사장은 양금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내저었다. "됐다, 가서 왕씨더러 저녁을 먹 으라고 해. 곧 나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양금은 곧바로 물러났다. 곽 사장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심사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신이 경빈에게 너무 심했다는 걸 느꼈다. 최근 들어 그로 인해 한두 가지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본래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자신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 오후에 일어난 일은 경빈으로서도 잘해보려고 한 일이었는 데 결과는 오히려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진성민의 유품에 대해서도 그는 자기자신의 일만큼이나 괴 로워했다. 곽 사장은 또 생각했다. 그가 만약 경빈을 면박줘서 내쫓지 않았다면 지금도 남아서 시예를 돌봐줄 것이고 그도 안심됐을 텐데, 그마저 가버리고 부인도 중앙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이제 시예를 보 살필 책임은 전적으로 그의 몫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할 만큼 사업상 중요 한 시가가 아닌가.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런 때 누가 시 간을 내서 시예를 보살펴 줄 수가 있을까? 그가 먼저 사정하지 않는 이상 결코 경빈은 이곳으로 돌아 오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시예가 위급한 상태라고 하면 곧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급히 달려오더 라도 얼마나 있어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스스로 이를 악물고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 가를 내려놓고 대북 중앙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부인의 담당의사를 찾았다. 그는 담당의사와의 통화를 통해서 부인이 병원에서 이삼 일 정도의 요양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들었다. 비로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시예까지 병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제 엄마와 함께 있으면 자 신도 안심하고 사업에 전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저녁에 갈 때 시예를 데려갈 테니 병원에서도 준비 해 달라고 일러두었다. 전화를 내려놓은 후 가방을 잠궈서 눈에 안 띄는 곳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나서 딸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시예는 언제 깨었는지 곽 사장을 보고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불 렀다. "아빠." "얘야." 그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딸의 손을 꼭 쥐었다. "좀 괜찮니?" 시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꼬리 사이로 맑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으로 눈 물을 닦으며 물었다. "엄마는 아직 안 오셨어요?" "엄마는 중앙병원에 계셔. 의사 말로는 이삼 일 요 양해야 된다는구나." "아!" 그녀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심장병은 아니겠죠?" "아니다. 의 사 말로는 혈압이 조금 높아서 그런데 곧 괜찮아진다는구나." 그녀는 조금 마음을 놓는 듯했다. "경빈 씨는?" "갔어." 그리고 덧붙여 한마디했다. "약속이 있다며 내가 돌아오자 곧바로 갔다." 부친의 말 을 그대고 받아들이는 듯 말이 없었다. "얘야." 곽 사장은 가볍게 부르며 설득조로 말했다. "너랑 한 가지 상의할 게 있다. 너도 오늘 신문을 보았겠지만 천광열이라는 자가 벌인 터무니없는 소동으로 네 엄마가 충격을 받은 것 같구나.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이란다. 구 원장과 내가 오후에 기 자회견을 했는데 내일 신문에는 사실이 밝혀질 거야." "아빠." 시예는 그의 말을 끊으며 덧붙였다. "왜 제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세요." "네 엄마가 진실을 알아줬으며 해서 그래. 앞으로 이틀 동안 난 공장 일로 정신없을 텐데, 그런 네 엄마도 잘 알고 있어. 난 병원으로 가서 엄마를 지켜주고 싶지만 그 럴 수가 없어. 내 생각으론 네가 병원으로 가서 엄마와 이틀만 지내주면 좋겠는데, 괜찮겠니?" 곽 사장 의 의도는 딸을 이틀 동안만 병원에 입원시키는데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가라고 하면 반발할 게 분명 했고, 집에 있으라고 할래도 돌봐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혹시 밖으로 뛰쳐나갈까 봐 걱정도 되었다. 이 렇게라도 해서 그녀가 병원에 가서 엄마와 같이 지낸다면 그로서는 일거양득인 셈이다. 시예는 역시 그 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그녀는 물었다. "아빠는 제가 병이 완쾌되면 엄마와 함께 출국시켜준다고 했잖아요. 이제 떠날 때가 된 거 아녜요?" "물론 그렇지. 난 이미 준비를 해놓았다. 비용도 다 마련해 놓았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즉시 출국 수속을 밟아 주마." 시예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으며 물었다. "난 언제 병원으로 갈까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양금에게 옷을 챙겨 놓으라고 일러라. 난 가서 구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북에서 우릴 기다려 달라고 할께. 함께 병원으로 가서 네 엄마를 봐야만 구 아저씨도 마음을 놓을 게다." "좋아요." 시예는 곧 대답했다. 곽 사장은 몹시 흡족한 기분으로 방을 나가 곧 전화로 구 원장을 찾았다. 마침 만찬 대접도 끝났고 해서 그는 시예를 돌보기 위해 곧바로 돌 아올까 생각하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곽 사장은 급히 상황을 설명한 후 구 원장에게 먼저 중앙병원에 가서 부인을 만나 사건의 진상을 해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후 그는 시예를 데리고 함께 병원에 가 겠노라고 덧붙였다. 사실 그가 보기에도 시예는 심신이 모두 쇠약해져 있어 병원에서 며칠 요양하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모든 건 그의 계획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구 원장이 언제 부인에게 해명을 해준다 면 자기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구 원장은 그 병원과 무관한 관계가 아니니 시예를 입원시키기가 좀더 수월할 것이다. 그가 우려하던 문제는 거의 다 해결이 된 셈이었다. 그는 안 심하고 전화를 끊은 후 대북으로 갈 채비를 끝낸 시예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이제 그는 적어도 이삼 일 동안은 안심하고 공장 문제를 처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 곽 사장 집을 나온 경빈은 한량없이 마음이 울적한 상태였다. 미처 스스로의 감정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는 도로 입구에 몇 분 동안 서 있었다. 부근에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퇴역 군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가게 안에서는 차표도 팔 고 있었다. 경빈은 때때로 대북에 갈 일이 있을 때 그것에서 차표를 사곤 해서 주인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늙은 주인이 의자를 갖다주며 석간 신문을 내놓았다. 경빈은 고마운 마음으로 환한 전등불 아래 신문을 펼쳐들었다. 대북으로 가는 차는 20분마다 한 대씩 있다. 방금 그가 신문을 보고 있을 때 대북 행 버스 한대가 곧바로 지나쳐 갔다. 이런 작은 정류장에는 서지 않는 직행버스였다. 그는 대북으로 갈 건지 아닌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마음이 온통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다. 그는 지금 누군가에게 내쫓겼 다는 분노와 치욕도 아니고 어떤 실수로 추궁받았을 때의 책임감 때문도 아닌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자신도 마음 깊은 곳에 흐르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인가 그런 감정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제삼자의 심정으로 변해 있었다. 뭔가 중요한 게 그의 내 면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잃은 것인가? 아마 아무 것도 잃지 않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었거나 둘 둥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그 작은 가게 입구에 앉아 줄곧 생각했다. 만약 영채를 만난다 해도 지금 이 기분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 길 바란다면 그건 위선에 불과하다. 병원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철규가 병원에 없으니 그의 숙소도 비어 있을 것이다. 그의 트렁크가 아직 곽 사장의 집에 있으나 다시 그곳에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약 그가 저녁에 영채를 만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구 원장 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약속을 어긴 처지가 아닌가? 그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집 없는 천사가 된 꼴이었 다. 신문을 들고 있긴 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재로선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관 심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일인들 그의 관심을 끌 가치가 있는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은 모두 하찮고 사소하게만 느껴졌다.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관심이 없는 데 세상일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마침 내 그는 대북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영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리라. 그가 막 결정을 내렸을 때 가게 주인인 노인네가 일깨워주듯 말했다. "주 선생, 차가 와요." "아, 고맙습니다." 그는 급히 신문을 내려 놓았다. "제가 잊고 있었어요." 그는 노인네에게 대북으로 가는 차표를 사들고 다른 두 명의 탑승객들과 함께 서 있었다. 일 분이 채 못 되 어 차가 왔다. 그는 묵묵히 차에 올랐다. 마침 차는 한산했고 그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차가 막 움직일 때 그는 숲 사이의 한 병실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불빛을 연민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런 불빛 어딘가에 시예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36 철규는 곽 사장 집에서 나온 후 길에서 각기 다른 두 사건을 목격했다. 하나는 화물차끼리 서로 충돌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택시가 행인을 친 사고였다. 철규의 오토바이 타는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덕 분에 그는 별 사고 없이 안전하게 대북에 도착했다. 국빈호텔 12층에 올라가 라운지를 한바퀴 살펴보 았으나 영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고 그녀를 기다렸다. 하늘은 점 점 검게 물들고 있었다. 높은 건물의 창에서 바라본 대북시의 야경은 그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했다. 그 는 가벼운 마음으로 창 밖의 밤 풍경은 감상했다. 지금은 경빈을 대신해 그녀를 기다릴 뿐 무슨 특별 한 목적이 있어서 만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시예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경빈이 나오지 못하 게 되었다는 걸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영채가 경빈에게 뭔가 전할 얘기가 있다면 그대로 전해 주면 될 것이고, 그 전에 곽 사장과 부인이 돌아오면 경빈은 즉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러면 그의 할 일은 다 끝나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책임 없는 제삼자였다. 그는 경빈에게 연민을 느꼈다. 비록 근래에 와서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극히 드물었지만 경빈은 뭔가 번뇌에 시달리는 게 분명했다. 운 좋게도 둘씩 이나 되는 부잣집 아가씨로 인한 번뇌였다. 철규는 이미 시예가 자신에게 흥미가 없음을 알고는 어렵 게 물러난 몸이었다. 그에겐 항상 한 가지 지론이 있었다. 경빈은 종종 그것을 '괴이한 이론'이라며 철규 를 놀리곤 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상한 이론이라 여기겠지만 그 스스로는 오히려 법처럼 존중하 고 떠받드는 이론이었다. 그는 애정도 도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사실 그는 도박에도 명수였 다. 연애라는 도박의 요령은 '참고, 기다리고, 미워하는' 것이었다. 애정을 쟁취하려면 인내심, 충분한 기 다림이 필요하다. 그러다 때가 오면 곧 맹렬히 달려들어야만 기회를 잃지 않는다. 이외에도 '뜨거운 것 을 두려워하지 말고 버릴 것은 버려라!'라는 말이다. 만약 기회가 생기면 어떤 어려움도 고려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 쟁취해야 한다. 그러나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을 발견하거나 희망이 없다고 판단될 때는 구 차하게 매달리지 말고 깨끗이 물러날 줄 알아야 시간과 정신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물론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좌우명처럼 받들어 온 이러한 현실의 이론을 변함없이 수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예가 자신을 무관심하게 대하자 곧 단념하고는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빈은 오히려 그 애정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는 영채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엾 게도 그 마음속으로는 시예를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더욱 가련한 것은 상대방도 경빈을 사랑한다는 사 실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의 내심을 아직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영 원히 숨긴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냥꾼처럼 예민한 철규의 안테나는 벌써 그들의 마음을 탐지 한 지 오래였다. 그런 것은 마음만 지켜봐도 알 수가 있는 일이다. 애정은 비밀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다. 여인의 눈빛은 마음 깊은 곳의 비밀을 그대로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규는 경빈에게 묻지 않고도 두 사람이 내심에 간지하고 있는 비밀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더욱이 오늘 시예의 방에서는 그녀의 경빈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철규는 그 순간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 로서도 경빈에 대해서는 조바심을 면키 어려웠다. 경빈은 그 한없는 선량함과 순진함이라는 큰산을 앞 에 놓고 어떻게 평화를 얻고 스스로를 지켜나가겠는가. 이런 상황은 결코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때 경빈은 얼마나 심각한 상처를 받겠는가. 그러나 철규로서도 이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 다. 이럴 땐 차라리 제삼자로서 방관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그가 경빈을 돕는다고 해봤자 혼란스럽 기만 할 것이고 스스로에게도 귀찮은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방관자적 심 정도 결코 가볍지만 않았기에 어떤 때는 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세 대째 담배를 꺼내 물고 더 이상 기다리기가 어렵겠다고 생각될 때쯤에서 홀연 영채가 식당에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걸 즐기는 듯했다. 몹시 유쾌한 미소를 띤 채 등장한 그녀는 미인 선발대회 에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일단 실내를 한번 훑어본 후 철규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그에게로 걸어왔다. 철규는 선 채로 그녀가 곁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의자를 권한 다음 자기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무슨 꿍꿍이속이라도 있어 요?" 영채가 그의 손에서 담배를 받아들었다. "우리?" 황철규는 잠시 멈칫했다. "지금 경빈이가 오 지 않았다고 그러는 겁니까?" "맞아요. 지난번 철규 씨와 나의 약속에는 결과적으로 그가 왔잖아요. 이 번 그와 나와의 약속에는 결과적으로 철규 씨가 오고." 철규는 비로소 무슨 말인가 알아듣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성냥불을 켜 영채한테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런 후 웨이터를 불렀다.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 판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일단 요리를 시켰다. 웨이터가 가자 철규가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날 환 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누가 철규 씨를 환영하지 않겠어요." 영채는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경 빈씨는 어디 갔어요?" 철규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그녀에게 사정을 알려 주면서 농담을 덧붙였다. "지난번 경빈이가 제 약속을 가로챘기 때문에 난 소인배라고 흉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동적으 로 내가 영채 씨를 만나보게 된 겁니다." "농담하지 마세요." 그녀는 여전히 새침했다. "그 말이 사실 이라면 경빈 씨나 철규 씨는 그간 다른 소식을 전혀 못 들었단 말인가요?" 철규는 마음속에 의문이 생 기는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눈치도 무척 빨랐다. 그녀가 이틀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도 석연찮은데 아무도 구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혹시 영채와 경빈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넌지시 그녀의 의중을 떠보았다. "전 다만 그가 두 사람의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말하는 것만 얼핏 들었어요." 영채는 갑자기 얼굴 표정 을 바꿨다. "농담 그만 하세요. 정말로 그가 철규 씨를 보낸 건가요?" 황철규는 더 이상 농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그만한 사정이 있어요. 환자를 버려두고 애인을 만나러 올 수는 없 잖습니까?" 영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환자가 누군데요?" "시예 씨요. 오늘 저녁 무렵에 그녀가 갑자 기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하고 말았기 때문이에요. 마침 그녀의 부모님도 모두 외출중이라 양금이 그에게 급히 와서 구해 달라고 해서..." "시예."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아, 시예라!" 철규는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분노도 나타내지 않자 다소 의외로 여겼다. "경빈이가 그녀에게 강심제 주사를 놓았어요. 시예 씨가 깨어난다 해도 지난번처럼 행방불명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한시도 곁을 떠나지 못했죠. 그가 곽 사장에게 연락을 취해 놓았으니까 돌아오는 대로 바로 이곳으로 올 겁니다." "시예가 어떻게 기절을 하 게 되었죠?" 그녀는 퍽 관심이 있는 말투였다. 철규는 잠깐 생각한 다음 진성민이 그녀를 속였다는 말 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직도 시예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그녀에게 해가 될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빈혈증세가 있었는데, 조금 심한 충격을 받고 병이 도진 겁니 다. 가정부도 정확한 상황은 말하지 않더군요." "경빈 씨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모르겠어 요. 아무도 안 나와 있는 상태에서 영채 씨가 먼저 도착해서 불안하게 기다릴까 봐 급히 이리로 오느라 고 물어볼 시간도 없었어요." "그러면, 철규 씨 생각으로는 경빈 씨는 시예가 무슨 일로 병이 났는지 알고 있는 것 같으세요?" "가장 좋은 건 영채 씨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겁니다. 구 원장님도 노련한 분이라서 환자의 병원에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무신경하실 겁니다." 영채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 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 철규 씨가 말한 상황을 미루어볼 때 경빈 씨는 이곳에 나올 수 있다는 건가요?" 철규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확정할 수는 없어요. 가령 곽 사장이 일찍 돌아온다면 그는 곧 올 겁니다. 그러나 곽 사장이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온 후에도 그녀가 의사와 함께 병원에 가길 원한다면 일찍 올 수가 없을 거구요." 영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때 웨 이터가 음식을 가져와서 두 사람은 잠시 말이 끊겼다. 오후 내내 바빴고 또 오토바이를 몰로 대북으로 오느라 배가 너무 고팠던 철규는 오로지 먹을 것만 생각했었다. 영채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듯 좀처럼 음식을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겨우 음식을 먹는 시늉만 하면서도 몇 차례나 무슨 말을 꺼 내려다 입을 다물곤 했다. 그리고는 수시로 출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철규는 그녀가 경빈을 기다리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 다. 그러나 그녀에게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영채는 겨우 밥 반공기와 국 반 그릇 그리고 반찬 몇 가지를 집어먹고는 곧 수저를 내려놓았다. 철규는 그 왕성한 식욕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수저를 내려놓 자 식사를 끝냈다. 웨이터가 사과를 가져왔다. 영채는 포크로 천천히 찍어 한 조각 한 조각 입으로 가져 갔다. 마치 삼키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내심 감추고 있는 곤란한 문제인 것 같았다. 철규는 분명 그녀 에게 무슨 사정이 생긴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마 오늘 그녀가 경빈을 보자고 한 것도 그 문제 때문 인 것 같았다. 그런데 철규가 대신 나온 것을 보고 말을 꺼내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철규로서 도 먼저 묻기는 난처한 일이었다. 그녀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다만 그는 경빈의 선배라는 관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는 그에게 말을 꺼내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경빈이 빨 리 와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줬으면 싶었다. 그런데도 영채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그녀는 결심이라도 한 듯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철규 씨와 만나기로 약 속했을 때는 상의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경빈 씨가 왔었어요. 난 그때 그 사 람과 얘기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날 그가 확실히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어요. 난 그 사람한테 말하려고 했어요. 어차피 서로 터놓고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믿었고 그래야 내 스스로도 안심이 되니까요." "그렇다면 일이 매우 공교롭게 되었군요. 오늘 만약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안 올 친구가 절대 아닌데." "지금 생각해 보니 철규 씨가 대신 나온 것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당신은 제 삼자니까 비교적 제 말을 편하게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철규 씨가 대신 경빈 씨에게 잘 전해주길 바랍니다. 사실 나는 그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 황철규는 깜짝 놀랐다. 그는 영채의 엄숙한 표정이나 말투에서 벌써 그녀의 신상에 중대한 일이 생겼음 을 눈치챘다. 필시 이 일은 경빈과 관계가 있는 것이리라. 그는 비록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 었지만, 적어도 그녀와 경빈의 혼인관계에 커다란 파란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다. 물론 경빈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이틀 전에 일어났어요. 그 러나 이미 오래 전에 예정된 일이었어요. 난 처음부터 철규 씨한테 알려주고..." 37 경빈이 그곳에 급히 도착했을 땐 철규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술을 꽤 많이 마신 듯했다. 탁자 위에 는 반쯤 든 술병과 술잔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그는 홀로 앉아 계속해서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경빈 은 탁자 위에 두 개의 잔과 젓가락이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영채가 왔다가 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철규의 옆자리에 앉았다. "영채는?" 철규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경빈을 쳐다보더니 한 참 후에야 대답했다. "갔어." "간 지 얼마 됐어요?" "아마 일이십 분 정도. 사실 네가 안 오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왜?" 경빈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영채가 형한테 화를 냈어요?" "나한테 화를 낼 일이 뭔가?" 철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경빈은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철규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 솔직히 말해줘요. 영채가 도대체 무슨 말 을 했죠?" 철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경빈아. 오늘은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내일 말해도 늦지 않아. 오늘은 그냥 우리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실컷 술이나 마시자." 그가 많이 취했다 는 생각이 든 경빈은 더 마시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철규는 이미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경빈은 한사코 말했다. "형, 그만 마셔요." "왜? 자, 자, 우리 건배하지. '오늘 아침엔 오늘 취 할 만큼의 술이 있다'라는 말도 있잖니!" 철규는 갑자기 고개를 든 채 한참 웃었다. "웃기는 소리. 겨 우 이 정도의 술로 내가 취하겠냐? 너 설마 내 주량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형은 오토바이를 몰아 야 하잖아요." "걱정마. 난 사고를 안 낼거야. 너도 취하도록 마셔. 좋아, 그렇지 않으면 난 아무 말고 해주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요?" "영채가 네게 전해 주라고 부탁한 말." "왜 직접 안 하고?" "헛소리." 철규는 완전히 비웃는 표정이었다. "내가 아까 그녀는 이미 가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니? 자, 우리 한 잔 마시고 나서 얘기하자." 경빈은 별 수 없이 잔부터 먼저 비워야만 했다. 사실 그 자신도 어찌 가슴 한구석에 불만이 없겠으며 취하고 싶지 않겠는가? 함께 잔을 비우고 나자 경빈은 생각난 듯이 몹시 배가 고팠다. 철규가 웨이터를 불러 요리 2인분과 술 한 병을 더 시켰다. 세 잔의 술 이 더 들어간 후에도 철규는 결코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시예 씨는 좀 좋아졌니?" "내가 나올 때까 지 자고 있었어요." "그럼 혼자 방에 내버려두고 나왔니?" 경빈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 말이었다. "아니야. 곽 사장님이 돌아오셨어." "시예 씨를 병원에 보내라고 말해줬겠지?" 경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형, 난 정말 깊이 생각해 봤는데 가급적 남의 일에 덜 간섭하고 덜 신경써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며..." "곽 사장이 너한테 뭐라고 했니?" 방금 전에 마신 술이 뱃속에서 후꾼거렸다. 그는 불만을 품은 채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다시는 곽시예가 어떻고 저떻고 신경도 쓰지 않겠어." 철규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그렇게 독한 녀석이 되길 바라지 않아. 설사 곽 사 장이 서운하게 대하더라도 넌 그를 이해해야 해. 시예 씨는 너한테 잘하고 있잖아. 너는 그녀를 실망하 게 해선 안 돼." 술 취한 사람치고는 제법 조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경빈을 감동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막연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설마 내게 빌기라도 하라는 건가요? 차라리 쫓겨나는 게 낫지 그렇게는 못해요." "경빈아." 황철규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세히 말해 봐. 내가 떠난 후 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어?" 경빈은 마음이 흔들렸다. 비록 곽 사장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억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가슴 가득 쌓인 오물을 모두 토해버리 고 싶었다. 그는 곽 사장이 집에 돌아온 후에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모두 말해버렸다. 철규 는 잠잠할 뿐 말이 없었다. 물론 경빈이가 안쓰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곽 사장이 화를 낸 게 잘못한 일 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빈아, 아까 그 일에 대해선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보장하겠는 데 곽 사장은 아마 널 보내고 곧 후회했을 거야. 걱정하지 말아. 내일 시예가 네게 전화를 걸어올 거야." "사실 잘됐어. 원래 영채가 돌아오자마자 난 그 집에서 나와야만 했었어. 그랬다면 생각지도 않았던 불 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았을 텐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 설령 네가 이사했다고 해도 그런 일을 피 할 수는 없었을 거야." "적어도 나에 대한 영채의 오해만은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넌 영채가 너를 오해했다고 믿니?" 그는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답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형, 갑자기 생각난 건데 이젠 나 자신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요 며칠간은 온통 남의 일 에만 신경을 썼고 괜히 고생만 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옛날 얘기가 돼버렸지만. 천광열, 장경민, 심지어 곽시예까지도 모두 신경 끊게 됐잖아? 지금부터는 오직 나 자신의 일만 생각할 거야." "자신의 문제라니?" "응, 형은 남이 아니니까 형과 상의해 보는 게 좋겠군. 내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어. 하나는 정식으로 영채와 결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으로 가서 몇 년 간 공부하는 거예요. 구 원 장님은 내가 어떤 길을 택하든 찬성하겠지. 항상 나나 영채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으니까." 철규는 멍청 한 눈빛으로 경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충분한 동정과 연민의 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잡시 생각한 후에 말을 꺼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난 네가 외국에 가서 좀더 깊이 연구하기를 바란 다. 결혼하는 일은 뒤로 미룬 채로 말야. 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거야. 기회가 왔으면 붙잡아 두는 것이 좋아." "형, 말이 좀 이상한데? 얼마 전엔 결혼 후에 유학가는 게 더 낫다면서요?" 철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술잔을 들며 얼버무렸다. "나는 단지 지금 상황을 말했을 뿐이야. 이 문제는 중대한 일이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우리 술이나 마시자." 경빈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철 규의 태도가 평상시와는 다르게 보였다. 설마 영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는 약간 당황했다. "철규 형. 영채가 전해 주라고 한 말이 뭔지 얘기해 줘요. 지금 듣고 싶어요." 철규 는 경빈을 한번 바라보았을 뿐 그 문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오늘 저녁에는 우리 흥미없는 일은 이야기하지 말도록 하자. 술 다 마시고 춤추러 가자." "안 돼! 형은 내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알고 있죠? 난 그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빨리 알고 싶어요. 구 원장 사모님께도 영채 소식을 전해 드 려야 해요." "만일 영채가 아예 오지 않는다면?" "농담하지 마세요. 영채가 왔었다는 것은 벌써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 황철규는 한 손가락을 펴 탁자위에 있는 두 개의 술병을 가리켰다. "우리 술 병을 따서 한 병은 내가 마시고 다른 한 병은 우리 두 사람이 절반씩 마시자. 이것 만 마시고 자리를 옮기는 거야. 네가 이 조건을 다 받아들인다면 말해 주지." "좋아요. 형 생각대로 합 시다." 철규는 두 사람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붓고는 술잔을 들었다. "첫 번째 잔!" 경빈은 그의 손을 잡으며 다짐을 두었다. "형은 두 가지 조건을 다 지키면 내게 모든 걸 말해 준다고 약속했어요!" "알 았다구. 뭐가 그리 급해?" 그는 경빈을 슬쩍 노려보았다. "어쨌든 너는 돌아가서 너의 그 원장 사모님 께 보고할 수 있으면 되잖아!" 철규의 나쁜 습관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조급해지면 술을 마구 퍼마시 는 게 버릇이었다. 못 마시게 하면 도리어 더 많이 마셨다. 경빈은 더 이상 그만 마시라고 재촉하지 않 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음이 혼란스럽기 때문인지 술은 금방 취했다. 술 두 병이 아직 다 비지 않 았는데도 두 사람은 취기가 역력했다. 철규는 술을 마시면서 약속과는 무관한 말들만을 늘어놓았다. "경민아. 여자가 널 휘어잡게 해서는 안 돼. 그건 신세 망치는 거야." 경빈은 따지듯이 그를 노려보았 다. "누가 여자한테 휘어잡혔는데요?" "내 말은 여자 때문에 네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철규 형, 걱정하지 마세요.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여인의 마음은 달과 같아서 그 속엔 항상 한 남자의 그림자가 있다.'고요." "물론 그말이 틀렸다고 하진 않겠더. 시예 씨 같은 여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경빈은 불쾌한 표정으로 철규를 노려보았다. "괜히 그녀를 들먹이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여자에요." 철규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경빈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정말 기쁘구나." "내 말이 틀렸어요?" "그럴 리가 있나? 지당한 말이야. 난 전적으로 네 말에 동의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여자야. 그러나 네게 이거 한 가지는 꼭 물어보고 싶다.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 영채냐, 아니면 곽시예냐?" "무슨 소리예요. 그게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죠?" 철규는 손으로 경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경빈아. 난 네가 좀더 솔직할 수 있으면 좋겠어. 주저하지 말 고 시예 씨를 사랑해라. 너와 다툴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금 그녀의 마음속엔 너뿐이야." 경빈은 술병 을 뺏어 들었다. "형, 취했어요. 이제 그만 마셔요." "취한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내가 취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아요." "그 병은 비어 있어. 내가 이미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을 잔에 부었어. 더 마시고 싶으면 다른 술병을 따라구." 경빈은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손안에 든 병 은 비어 있었다. 탁자 위의 다른 술병도 모두 비어 있었다. 어느새 다 마셔버린 것이다. "우리 그만 마 시는 게 좋겠어요." "좋아." 철규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난 널 대신해서 왔으니 여기선 네가 사라. 차는 내가 맡을게." 경빈은 술을 더 마시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철규를 취하게 해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에서 계산을 치렀다. 그런 후에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아래층의 주 차장에 이르자 경빈은 문득 걱정이 됐다. "형, 오토바이를 몰 수 있겠어요?" "웃기지마. 왜 못해? 겨우 이 정도 술로?" 경빈은 그의 말만 믿었다. 평소에 철규의 주량은 그보다 훨씬 센 편이었다. 그러나 지 금은 달랐다. 사실 큰 소리는 쳤지만 철규는 실제로 취기를 가누기가 어려웠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모두 하얗게 어른거렸고 행인의 얼굴까지도 두 개로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한밤의 중산북로는 지금 이 시간의 하루 중 가장 복잡한 때로 차량은 마치 물방울처럼 연속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수많은 차량의 물결 속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마치 파도에 한 떨리 하얀 물방울 꽃이 튀어오르는 것 같 았다.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철규의 몸은 전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으며 오토바이 도 줄곧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마치 두 사람이 주점에서 걸어 나올 때 모습 같았다. 아마도 밤바람 때문 인지 경빈은 정신이 좀 맑아졌다. 그는 뒷자리에 앉아 철규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우리 담수로 돌아 가는 거예요?" "누가 담수로 돌아간다고 했어? 아까 내가 춤추러 가자고 하지 않았니?" "하지만 형 이 가는 쪽은 담수로 돌아가는 길인데요." 철규는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 미 중산북로를 질주하고 있었는데 기륭강의 대교가 눈앞에 펼쳐졌다. "젠장, 돌아갸야겠군." 철규가 오 토바이의 방향을 돌렸다. 뒤에서 급히 차를 세우는 날카로운 금속 소리와 심한 욕설이 들려왔다. 맞은편 에서 오던 차 역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철규는 오토바이 방향을 완전히 틀지도 못 하고. 옆으로 빠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주저주저하다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오토바이는 마침내 안전 분 리대를 들이박고 뒤집혀 버렸다. 두 사람은 그 충격으로 순식간에 오토바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철 규는 정차해 있던 차 옆으로 떨어졌고 경빈은 안전 분리대 바깥쪽으로 튕겨져 보도 위에 나동그라진 채 정신을 잃어버렸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고현장은 한동안 구경꾼들의 웅성대는 소 리로 가득 찼다. 마침 경찰이 출동했다. 그들은 택시를 불러 두 사람을 싣고 가까운 마해병원으로 달렸 다. 사고 현장이 수습되자 구경꾼들은 이내 흩어졌고 도로가 소통되면서 차량들도 다시 정상속도로 달 렸다. 사고 오토바이는 경찰서에 보관되어졌다. 사고가 수습된 후에도 도로는 얼마간 처참한 모습으로 방치되었다. 한쪽 모서리가 크게 부서진 안전 분리대 근처에는 찢겨진 옷이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의 핏 자국으로 범벅이 되다시피한 옷가지들은 사고 현장의 끔찍했던 광경을 보여주는 듯 한동안 오가는 사람 들의 눈길을 끌었다. 38 다음날 신문엔 꽃무늬로 테두리를 장식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 제목은 '이국 만리에서 한 줄기 사랑의 끈으로 맺어진 아름다운 부부 탄생. 전생부터 이미 정해진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부잣집 아가씨가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동경에서 젊은 화교청 년과 만나게 되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 얘기가 오가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는 이미 사윗감을 정해 놓았던 터라 이 소식을 듣고는 급히 재촉하여 모녀를 대만으로 불러들였 다. 두 사람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간절한 그리움을 담 은 편지로 거의 매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3일전 그 화교는 일본에서 건너와 대만에 잠시 머무르 게 되었다. 이별 뒤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었다. 부친의 반대를 예상한 두 사람은 곧 법원에 가 서 결혼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신혼여행 차 일월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꿈같은 사흘을 보낸 뒤 어제 대북으로 돌아가는 수속을 밟고는 함께 떠나기로 했다. 이 화교청년의 이름은 황계출인데 그의 부친은 일본의 유명한 사업가라 한다. 신부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할 만한 구봉갑 정신병원의 외 동딸인 구영채 양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의 짤막한 기사가 같은 날 신문에 실렸는데 대북 중산 로의 차 사고 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황철규와 주경빈 두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어진 기사였다. '구본갑 정신병원의 젊은 의사 황철규와 주경빈은 음주 후 오토바이를 몰다가 안전 분리대에 부딪쳐서 오토바이 는 완전히 부서졌고 당사자들은 중상을 입어 마해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는데 위험상태는 면했다.'는 내용이 그 기사의 전문이었다. 구 원장은 집에서 신문기사를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화가 끓어올랐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밀치고 들어가 부인을 깨웠다. 원장 부인은 졸리는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며 짜증을 냈다. "대체 무슨 일이죠?" 구 원장은 그녀에게 신문을 던지며 소리쳤다. "당신이 직접 보 시구려?" 아직 완전히 떠지지 않은 눈을 한번 비비고 신문을 읽어 내려가던 부인을 정신이 번쩍 들었 다. 그녀는 마치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일이죠?"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소." 구 원장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부인을 다그쳤다. "영채를 데리고 일본에 갔던 건 당신이잖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신문에 법원에서 결혼 절차를 밟았다 는 기사까지 실렸는데 어찌 사실이 아니겠소. 오늘 그들이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써 있잖소." "그러나 영채는 여태껏 제게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어요." "황계출이란 이름조차 못 들어봤소?" 그 애가 성이 황씨인 화교청년과 사귄다는 걸 알았지만 만난 적은 별로 없었어요. 그것도 한두 차례 여러 사람이 모 여 있을 때였지요. 별로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당신은 내내 탁자에만 앉 아 있었을 텐데 어떻게 눈치챘겠소?" 부인이 이 말을 듣자 화를 벌컥 재며 따지고 들었다. "다 큰 딸 애를 제가 어쩌겠어요? 그 애를 묶어서 자물쇠라도 채웠어야 했나요?" "그 애를 묶어두라고까지는 안 했소. 하지만 최소한 사전에 눈치는 챘어야지. 내 체면이 도대체 뭐가 되겠소? 그리고 경빈이한텐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겠소?" 부인의 눈 언저리가 붉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말했다. " 제가 어쩌겠어요? 영채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제게 무슨 방법이 있었겠어요?" 구 원장은 문득 자기가 너무 심하게 부인을 닦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일이 어찌 부인 혼자만의 잘못이겠는가? 게다가 일은 벌써 벌어진 상태고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려 버렸으니 이 상황에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오늘 오전에 나를 찾아오겠다는데 당신 혼자 만나요. 나는 안 볼 테니." " 여보." 부인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구 원장의 뜻은 결 코 바뀔 것 같지 않았다. "난 경빈이를 만나러 가야겠소. 틀림없이 이 일을 먼저 알고 충격을 받아 사 고를 낸 것일게요." "사고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는 또 한번 놀랐다. "신문에 기사가 났어요. 경빈이랑 황철규랑 같이 오토바이를 탔다가 사고를 내서 중상을 당했소. 신문에선 그냥 단순한 음주사 고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영채 때문에 술을 마시고 사고를 낸 것이 틀림없소." "아, 맙소사!" "난 병원 에 가서 그들을 만나봐야겠소. 만약 경빈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구 원장은 정말 괴로웠다. 그는 말을 마치자 곧 집을 나와 장씨에게 차를 준비시켰다. 오늘 갑자기 이 런 일만 생기지 않았다면 그는 무척 기뻤을 것이다. 신문마다 그 동안 천광열이나 장경민에 관한 문제 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병원 책임자인 그가 최선의 노력을 가울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한껏 추켜세웠 다. 덕분에 곽 사장에 관한 헛소문을 물리치는 데도 성공했다. 그처럼 골치 아픈 일들이 원만하게 해결 되고 보니 기분 좋아질 만했다. 그러나 같은 날 또 다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그 좋던 기분 은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아침식사 도중에도 사방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곽 사장의 전화 를 포함해서 모두 영채문제를 확인하려는 전화였다. 정말 그는 낯이 뜨거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 랐다. 결국 그는 하는 수 없이 누구든지 전화로 자신과 부인을 찾거든 모두 없다고 말하도록 유자에게 시켰다. 그리고 아침도 제대로 못 먹은 채 바삐 차에 올라타고는 대북으로 향했다. 경빈과 철규는 같은 병실에 있지 않았다. 구 원장은 병원에 도착한 후 우선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 한 뒤에 경빈의 병실부터 찾아갔다. 경빈은 머리에 붕대가 감긴 채 왼쪽 팔을 깁스한 데다 두 다리도 역시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구 원장은 깊이 잠들어 있는 경빈의 병상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철규의 병실로 가보았다. 철규는 훨씬 더 상태가 심각했다. 그에 비하면 경빈의 부상은 차라리 가벼운 편이었 다. 경빈의 상처는 기껏해야 두 주 정도 휴양하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운전자인 철규의 몰 골은 완전히 중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데다가 왼쪽 어깨도 탈골되었으며 온몸에 수없이 많은 찰과상을 입었다. 다행히 수술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쉽게 일 어날 처지가 못 되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장기간 입원치료를 받는다 해도 왼쪽 다리는 영원히 불구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병원에 호송되었을 당시 술에 취해 있기도 했지만 사고로 정신이 혼 미한 상태였다. 더구나 현장에서 옷이 다 찢어져나가는 바람에 몸에도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한동안 그들의 신분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구 원장에게도 연락이 갔 던 것이다. 신문에 그들의 이름이 철규보다 먼저 정신이 돌아온 경빈에게 병원측이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침에 담수병원에 전화로 알렸지만 구 원장은 출근 전이었으므로 집에서 신문을 보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경빈은 정신이 들고 난 후에 무엇보다도 전날 기자회견에 관한 일이 궁금했다. 아침 일찍 간호사에게 신문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신문에 그들 두 사람의 사고에 대해 어떻게 씌여져있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이 사고 때문에 안 그래도 경황이 없을 구 원장에게 번거로움 을 끼치게 될까 봐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그와 관련된 제3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영재의 결혼소식이었다. 그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으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이건 정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는 어리둥절 할 뿐이었다. 그러나 신문엔 구영채의 이름과 저간의 사실이 명백히 적혀 있지 않은가, 믿고 싶지 않다 는 이유만으로 사실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태도와 행적이 분명치 않았던 3일 간의 외 박을 생각해 냈다. 그 모든 게 교묘하게 일치된 우연이 아니라 계획한 바대로 배치된 필연이었던 것이 다. 처음에 그는 그다지 실망하거나 크게 분노하지도 않았다. 물론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나 극도로 상심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영채 는 그에게 아주 작은 희망을 주었었다. 지금 이 소식이 그에게 준 타격은 실연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희망의 덧없는 사라짐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색의 영롱한 빛깔로 마구 부풀어오르다가 갑자기 터져버린 비눗방울처럼 사라져갔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고, 언젠가는 그 사랑이 두 사람을 결속시 키리라는 희망을 가슴 깊이 간직하였다. 한사코 시예를 향해 내달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면서까지 그는 영채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 이 일은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피동적 위치에 두고 진행되었다. 그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느 꼈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의 놀림감이 돼버릴 것이다. 그는 영채를 잃었으 며 동시에 사랑에 대한 희망도 잃었다. 다른 건 다 참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자기 모든 상체에 통증이 느껴지기라도 했다. 통증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간호사는 맥박과 체온을 확인한 뒤 진통제를 주사했다. 곧 정신이 몽롱해지며 잠이 들어다. 한참 후에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땐 마침 구 원장이 그를 보러왔다. 구 원장은 침대 곁에 앉아 자상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경빈 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영채가 그렇게 돼서 정말 미안하다. 난 이 일 때문에 너와 황선생이 다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솔직히 오늘 아침 신문을 보기 전까지는 나도 아무 것도 몰랐다." 경빈은 마 음이 몹시 흔들렸지만 억지로 감정을 눌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견딜 수 없 을 것 같았다. 그는 있는 힘껏 구 원장의 손을 쥐었다. "오히려 제가 원장님께 죄송한걸요. 원장님의 체 면을 손상시켰고 번거로움을 끼쳐 드려서요. 영채 일은 저 역시 오늘 아침에 신문을 읽고 알게 되었습 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방금 전에도 여기 왔었는데 너는 막 잠이 든 것 같아서 황 선생을 먼저 만나고 오는 길이다." "철규 형은 어떻습니까? 간호사한테 물어봐도 자세한 얘길 해주지 않았어요." " 너보다 좀 심하긴 하지만 괜찮다. 내가 병원에 얘기해서 곧 특실로 옮기라고 해놓았어. 좀 있다가 너도 그곳으로 옮기면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어. 그러면 좀 편하겠지." "원장님..." 그는 뭐라고 말할 수 가 없었다. 구 원장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 헤아린다는 듯이 그의 손을 잡았다. "경빈아." 구 원장이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젠 마음 편히 먹고 휴양이나 잘 해라. 그리고 너무 많이, 깊이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 딸과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여전 히 이전과 마찬가지라는 점이야. 나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줄곧 너를 내 아들로 여겨왔어. 이후에도 그 건 마찬가지야." 어느새 또 감정이 혼란스러워지고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빈은 속으로 이를 악물고 겨우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전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는 걸 원치 않아요. 저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족이 하나도 없는 외톨이인걸요." 구 원장은 자상함이 넘치는 눈빛으로 경빈의 손을 꼭 쥐었다. "얘야, 넌 고아가 아니야. 네게는 널 매우 사랑하시는 외할머니가 계시지 않니?" "맞 습니다." 외할머니란 이름을 듣자마자 경빈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빛은 흐려져 버렸 다. 그는 조용히 탄식했다. "그분은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어요. 그러나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질 않습 니다." 구 원장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병실 안의 다른 환자 들을 의식하고 그 일은 나중으로 미뤘다. 그는 단지 몇 마디 말로 위로만 해주었다. "아직도 네게는 그 분의 사랑이 미치고 있단다. 모쪼록 열심히 살아야 돼 그래야 하늘에 계시는 네 외할머니의 영혼을 평 안케 할 수 있는 거다." 경빈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장님, 저는 꼭 그렇게 살 겁니다. 돌 아가 쉬세요. 그리고 저를 대신해서 영채를 축복해 주세요. 이건 제 진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구 원장의 두 눈언저리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손수건을 꺼내 오히려 경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남자는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몸을 잘 돌보거라. 난 병원 책임자를 만나보고 가야겠다." 구 원장은 말 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듯이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경빈은 멍한 눈길로 그가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복도 모서리를 돌아가는 구 원장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빈 은 자신이 슬픈지 기쁜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영채는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렸다. 경빈의 머릿속으로 뭔 가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어젯밤 황철규가 그에게 알리고자 했던 소식이었다. 그는 차마 그 말을 전하지 못하고 폭음을 했던 것이다. 만일 영채가 귀국하기 전에 신문에 이런 소식이 실렸던 들 그는 매우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일찍이 그녀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와 함께 여러 날을 보내면서 그녀에게 점차 사랑을 느끼려 하던 차에 갑자기 이 소식을 알 게 되어 타격이 심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영채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이란 억지로 할 수 없 는 것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과거엔 영채에 대한 그의 감정이나 그에 대한 영채의 감정이나 서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게 못 되었다. 그러니 만큼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 역시 그녀가 귀국한 후에야 비로소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녀도 아마 그때서야 사랑의 감정을 가져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둘의 마음이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대 뜻밖에도 황계출이 나타난 것이다. 얼마 전 영채가 철규를 만나고자 했을 때 자신이 대신 약속장소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 그녀는 그 얘기를 하려고 철규와 약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경빈을 만나게 되 니 마음이 약해졌을 테고, 그래서 이틀 뒤 다시 만나자고 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때쯤 황계출이 막 대북 에 도착해서 그녀에게 온갖 선심을 다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어쩌면 두 사람은 법원에서 절차를 밟 고는 일월담으로 여행을 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까지 정확하게 72시간이 된다. 분명 영채는 이 일로 인해 그가 갑자기 충격을 받기를 원치 않아 미리 철규를 만나려고 했을 것이다. 철규가 그녀의 상 황을 경빈에게 전해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런 뜻밖의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 줄 알았겠는 가? 철규가 그 일로 갈등을 겪지 않았다면 술에 취해 사고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일 곽 사 장 집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면 경빈 역시 술 마시러 가진 않았을 것이다. 두 가지 일이 우연히 일 치되면서 불행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도대체 꿈인가 생신가? 열 몇 시간 동안 경빈은 정말 꿈속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현실은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에다 견디기 어려운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을 많이 생각할 수 없었다. 계속 잠자고만 싶었다. 잠 속에선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며 통증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기고 결심했다. 그저 한숨 푹 자고만 싶었다. 한잠 자고 일어나면 아마도 모든것이 변해 있을 것이다. 설사 모든 것이 변할 수 없다해도 그때쯤이면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생 길 것이다. 39 한 시간 후 경빈은 특실로 옮겨졌다. 철규도 그와 함께 있게 되었다. 철규는 자신보다 상처가 훨씬 심 해 보였다. 얼굴까지도 거의 붕대로 감아 눈, 코, 입만 겨우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근심하거나 아파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경빈이 들어서는 걸보고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경빈아! 우린 또 함께 있게 됐구나." "형은 어때요? 괜찮아요?" "별로 견딜만 하지 않아. 너는?" 경빈은 자신 의 왼쪽 팔을 가리켰다. "아마 몇 주일 후면 회복될 거야." "그럼 괜찮군." "형 다리는 어떻게 됐어 요?" "나도 몰라." 철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아마 다시는 오토바이를 몰 수 없을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겠지?" 경빈은 근심스런 물음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편이야. 좀더 심하면 잘 라내야만 해. 넌 늘 내 오토바이 뒷좌석이 여태껏 한 번도 빈 적이 없다고 놀리지 않았었니? 이젠 앞좌 석마저도 비게 됐구나." 경빈은 일순 암담해졌다. 그가 저렇게까지 낙관적인 줄은 몰랐다. 내심 안타깝 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철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자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형, 미안해요. 모두 제 탓이에요." "안전 분리대 탓이야. 그것이 우리 오토바이에 부딪쳤기 때문이야." "형, 어제 저녁에 왜 영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얘길 하지 않 았어요?" "원장님이 말씀하셨니?" "신문에서 읽었어요. 물론 원장님이 오셔서 다시 한번 확인해 주셨 지만." "난 정말 이전에 원장님을 '가을 호랑이'라고 불렀던 게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제 보니 우리 영감님은 보살 같아. 내가 일으킨 사고에 대해선 한마디 싫은 내색도 안 하시더라." 경빈은 잠자 코 듣고만 있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문득 구 원장이 자기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긴다는 그 몇 마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구 원장이 자신을 위로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얘기를 철규에게 말하고 싶니 않았다. 괜히 자랑하는 건 더욱 싫었다. "경빈아, 영채 때문에 너 무 괴로워하지 마. 그녀가 널 배신했다고 해서 결코 세계의 종말이 온 건 아니잖아." "그래도 형은 저 한테 실수한 거예요. 그 얘길 사실대로 말해주었더라면 전 형이 그렇게까지 마시도록 내버려두진 않았 을 거예요." "오히려 난 네가 너무 마실까 봐 걱정했지." "철규 형." 경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형 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내가 충격받은 건 사실이고 자존심이 몹시 상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 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난 차라리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다고 생각해요. 만일 그녀가 귀국하 기 전에 발생했다면 난 기껏해야 어깨 한번 으쓱하는 정도였겠지. 하지만 지금도 더 이상 그 문제로 상 처받고 싶지 않아요." "경빈아, 네가 좀 좋아지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물 론 난 유학시험에 응시할 생각도 있어요. 결혼 문제는 나가서 몇 년 고생한 뒤에 다시 생각하고 싶어 요." "그것도 과거를 잊는 한 가지 방법이 되겠군." "전 형처럼 먼 훗날까지 생각하진 않고 다만 병원 에서라도 편안히 며칠 누워 있고 싶을 뿐이에요." 철규는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였다. "내일이 또 어 떤 날이 될지 누가 알겠어?" 마지막 이 한마디 말에 경빈은 만감이 교차되는 느낌이었다. 서양속담 하 나가 떠올랐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이다.' 그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맞았어. 우린 누구도 미래를 예측 할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뜻밖의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뒤 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는데, 다시는 병원에 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형도 아까 내 뜻을 말리지 않았어요. 그렇죠?" "경빈아. 난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어." 철규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난 네가 완전히 회복되어 퇴원한 후 원장님과 상의하라 는 뜻이었어. 만일 그분이 널 붙잡으면 굳이 그분을 난감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비록 그가 너의 장인이 될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나와 너의 스승이잖아? 우리는 그분 의견을 존중해야만 해." 경 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그로서는 상당히 난처한 일이었다. 다시는 병원 동료들 얼 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왠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 대 산 구 원장의 진지한 태도를 생각해 보면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채가 먼저 그를 저버렸으므로 구 원장의 마음은 더욱 편치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그가 떠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 다. 이런 생각들은 그의 마음을 더욱 혼란시켰다. 그는 자신의 문제로 더 이상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 다. 다행히 이 병실은 시설이 아주 쾌적하고 또 그들 두 사람만 쓰는 특실이었으므로 보통 병실에서 낯 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에 비해 훨씬 견딜만 했다. 철규의 말대로 편안히 누워 있다가 다시 생각하기 로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병실은 하루종일 문병온 친구들과 동료들, 그 리고 학교 친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장경민과 조경준도 문병을 왔다. 아무도 영채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들 그것이 사고의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경빈의 처지를 이해 하고 동정하는 편이었다. 이런 것들이 비록 경빈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로 하여금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우울했던 기분을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오후에 영채가 사람을 시켜 두 다발을 꽂과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경빈에게 쓴 것으로 그에게 사과 와 완쾌를 기원하는 짧은 내용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방문하지 못함을 이해해 달라고, 그라 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편지 때문에 경빈은 한참 동안 마음의 평화를 잃어야 했다. 영채의 목소 리, 그녀의 웃는 모습이 또다시 편지지 위에 어른거렸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영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프도록 인식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철규를 의식한 탓에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 의 일 때문에 그로 하여금 염려하거나 동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철규는 영채한테서 온 편지 내용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는 묵묵히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철규가 입을 열었다. " 영채가 생각 잘했군.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낸 것 말야." 경 빈은 그가 돌려준 편지를 받다들며 동문서답했다. "꽃이 참 예쁘군. 나한테도 좋은 생각이 있는데, 우리 방에 있는 이 많은 꽃들을 어젯밤 같이 지냈던 병실의 환자들에게 갖다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반대하진 않아." 철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미연 씨가 내게 보낸 꽃은 남겨좋기를 바란다." " 질투 때문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요." 경빈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도 영채가 보낸 꽃은 남겨놓을 거 야. 어쨌든 호의로 보낸 거니까." "넌 나보다 훨씬 착하군. 만일 내가 너라면 난 아마 그녀의 꽃을 창 밖으로 던져버렸을 거야. 넌 오히려 그녀를 미워하지도 않기로 한 모양이지? 그러나 명심해. 착한 사람 은 언제나 손해를 당하기 마련이야." "또 시작이군요." 경빈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또 새로운 괴상한 이론이라도 발견한 거예요?" "새로운 것은 아냐. 내가 말하지 않았니? 여자는 모두 착실한 남자 를 좋아하지만 자기 곁에 남겨두기는 원하지 않아. 만일 내 추측이 틀림없다면 영채는 분명히 네가 퇴 원하기를 기다렸다가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줄 거야.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덜어보려는 수작이지." 경빈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다시는 연애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아. 난 형과 달라서 충격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워." "너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니?" "만나고 싶어." 경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일본에 갈 거예요." "네게 한 가지 충고할 게 있어." "말해 봐요." "그녀를 잊어버려. 다시는 그녀 때문에 네 마음을 낭비하지 마. 편지는 내게 넘겨줘. 그리고 영채가 보낸 꽃도 다른 곳으로 치워야겠다. 다시는 그녀가 이 방에 남 아 있지 못하게 하겠어." 경빈은 그의 옹졸함을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마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하면 적어도 헤어진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 머물도록 내버려두고 싶어요. 그리고 내일 오전에 구 원장님이 오 실 텐데, 그분이 물으면 좀 난처하잖아요." "그녀가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흘릴 일이군. 너는 다른 사람 생각만 하다가 항상 손해를 보는 거야." "너무 추켜세우지 마세요. 이건 착하고 안 착하고를 따질 문제 가 아니에요. 난 단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그럴 따름이라구요." 그들이 한참 이야기하고 있을 때 왠 불청객이 불쑥 들어왔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인지라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불청객은 바로 천광 열이었다. 예상외로 그는 그들에 대해 조금도 악의가 없어 보였다. 얼굴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참 회가 교차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와 어린 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 하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천광열 씨!" 경빈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예." 천광열은 그가 먼저 아는 척하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주 선생님 그리고 황 선생님, 저는 두 분이 제가 여기 온 걸 이상하게 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럴리가요? 앉으시죠!" "갑사합니다," 바짝 긴장했던 철 규도 마음이 놓이는 기색이었다. "탁자 위에 담배가 있으니 피우세요." "신문에서 두 분의 사고 소식 을 읽고 매우 불안했어요. 신문엔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염려 말아요." 황철규가 덧붙였다. "살 아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 "주 선생님." 천광열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말을 잘하지 도 못하고 물건을 살 돈도 없어서..., 다만 제 마음을 드릴 뿐입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해도 고마운 일이죠." "저는 내일 대북으로 떠날 겁니다. 모쪼록 두 분께서 못난 저의 행동을 좀 이해해 주십사 부탁도 드리고, 또 황 선생님의 옷도 돌려드려야겠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천광열은 손에 들고 있던 노란 종이백을 정중하게 건네주었다. 철규가 그것을 열어 보니 옷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다. 철규에겐 정말 뜻밖이었다. "그냥 입으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가질 수 없어요." 천광열이 말을 이었다. "저는 선생님의 옷을 훔칠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송 선생님을 해칠 의도 는 더욱 아니었어요. 그날 두 분 선생님이 모두 안계셔서 저는 휴가를 청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부득불 그랬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죄 송스럽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일은 잊으세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경빈은 그를 위로하며 덧붙여 물었다. 천광열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만 가로저을 뿐 아무 말도 안 했다. "당 신은 두 분 어른께 큰 페를 끼쳤어요. 오늘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읽어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천광 열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도 기자 선생님이 저를 찾아와서 제게 무슨 할 말이 없느냐 고 물었어요. 제 친구는 제게 곽 사장을 반박할 자료를 다시 준비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실 건가요?" 경빈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하지 않을 겁니다." 천광열을 고개를 세게 저었다. "두 분 선생님께 너무 죄송합니다. 전 이제서야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병원에서도 그때 곽 사장과 진희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했잖습니까?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사람이 한번 바보가 되는 것은 아주 쉽죠 그러나 저는 두번 다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진희는 사실 제게 아예 관심도 없었어요. 게다가 그녀는 지금 인기 있는 호스티스인데 저 같은 가난뱅 이를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맞아요!" 철규는 맞장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대 장부가 여자 하나 때문에 앞길을 망쳐서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경빈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상투적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음 다만 제삼자의 무책임한 위로일뿐 당사자에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전혀 경빈의 반감을 눈치 채지 못했다. 천광열이 진지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황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경빈 은 잠자코 있다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덧붙이려 했다. "천광열 씨, 나는 의사가 아닌 친구로서 당신에게 한가지만 부탁할 게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당신에게..." "주 선생님, 말씀하세요. 말씀만 하 신다면 성심 성의껏 따르겠습니다." "그러죠.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는데 다시는 곽 사장과 만나지 않 을 생각인가요? 어차피 이제 과거의 오해가 모두 밝혀졌으니 그간의 원한도 풀어 버려야지, 맺어두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교롭게도 이때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문앞에 나타났다. "천광열,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천광열은 잠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경찰관에게 양해를 구한 후 경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주 선생님, 솔직히 말해서 곽 사장의 인간성은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저도 사실 그에게 소란을 피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년 동안 제가 지내온 날들이 정말 힘들었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쌓인 원한이 하루 이틀에 사라 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제가 다시 빛을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선 생님께 약속하겠습니다. 이후에 제가 다시 곽 사장을 괴롭힌다면 그땐 저 천광열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진 마세요." 경빈의 말이었다. "주소를 적어주세요. 며칠 수 퇴원하겸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두 분을 속일 생각은 없어요. 저는 이미 교도소예 수 감되도록 판결을 받았어요. 원래는 오늘 집행을 해야 했지만, 제가 선생님들을 찾아뵙기 위해서 하루만 연기시켜달라고 청구했어요. 이년 후에 만일 두 분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그때 선생 님들을 찾아오겠습니다." 경빈은 주머니를 뒤져 1만 원짜리 지폐 5장을 꺼내 천광열에게 주었다. "혹 시 필요할지도 모르니 가져가세요. 그곳에선 규칙만 잘 지키시면 지내기 편할 겁니다. 그리고 아무 때고 편지 주세요. 저도 힘닿는 데까지 당신이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천광열은 한사코 경빈이 주는 돈을 사양하다가 결국 어색해 하며 받았다. 철규도 그에게 옷 두벌을 주었다. 그는 거듭 고맙다고 인사한 후에 비로소 눈물을 닦으면서 경찰관을 따라갔다. "강산은 변하기 쉽지만 본성은 바뀌기가 어렵 구나!" 그가 떠나자 철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경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광열 씨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너를 두고 한 말이다. 남의 일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해놓곤 금세 또 상관했으니 까." "그럼 뭐 형은 상관 안 했나요?" 철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별 수 있겠어? 우리는 본 성이 똑같은 걸.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권했을 거야." 40 3일쯤 지나자 경빈의 건강은 몰라보게 회복되었다. 이제는 실내에서 어느 정도 걸을 수도 있었다. 철 규의 다리는 여전히 침대 틀에 고정시켜져 있었으나 다른 상처는 많이 좋아졌다. 구 원장은 잠깐 동안 이라도 거의 매일 그들을 보러오곤 했다. 그 지극한 배려와 관심에는 두 사람 모두 깊이 감동을 받았다. 미연은 매일 저녁 두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왔다. 철규에 대한 그녀의 정성은 한마디로 감동 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경빈의 마음속에는 질투심과는 다른 참 미묘한 감정이 일어나곤 했다. 미연의 세 심한 배려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영채가 매일 보내오는 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히 그의 아픔만 자극할 뿐이었다. 그는 하루하루를 막연한 기다림으로 보내야 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말할 수도 없었다. 철규는 내심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결코 말하지 않 았다. 그는 시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헛된 기대인 줄 알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기대가 헛 되다는 걸 인정해주기나 하듯이 여러 날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설령, 온다 하더라도 요 며칠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가 기절했던 날 곽 사장의 집을 나온 후로는 그녀의 소식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 다. 그는 그녀가 분명히 병원에 입원했을 거라고 믿었다. 그가 집을 나오기 전에 공교롭게도 곽 사장 부 인이 몸이 아파서 중앙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있다는 양금의 말을 들었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중앙병 원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요 며칠 사이에 그녀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혹 그 녀의 병이 더 심해진 건 아닐까? 만일 그녀가 그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면, 그리고 그녀의 몸이 불편하 지만 않다면 한 번쯤 병원에 들러 주었을 것이다. 신문에 연이어 이틀이나 그의 이름이 보도되었는데 그녀가 신문을 보았다면 왜 모르겠는가? 그녀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적어 도 곽 사장이 그녀의 문병을 막았을 리가 없으리라. 그는 곽 사장이 그 정도로 자신을 시예로부터 따돌 릴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그녀가 병중이라 신문을 아직 보지 못했다는 것 하나뿐이 었다. 그 사이 곽 사장은 한번 들렀었다. 마침 그들이 잠들었을 때, 직접 다녀갔는지 아니면 사람을 시 켜 보냈는지 확실치 않으나 선물과 명함을 두고 갔다. 그러나 경빈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곽 사장은 나 름대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도량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다림의 끝은 늘 더디 오기 마련인가. 그들이 마해병원으로 들어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오후였다. 경빈의 희망이 거의 마름하던 날 갑자기 곽시예가 그들의 병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흰색 투피스 차림으로 손에는 한 다발의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경빈의 눈에는 그 모습이야말로 순결한 백의의 천사 같았다. 그녀는 먼저 철규 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 경빈에게로 돌아섰다. 석고를 한 두 사람의 손과 몸에 감겨져 있는 붕대를 본 그녀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철규가 급히 말 을 받았다. "제가 잘못한 거지요. 글쎄, 이 친구를 태우고 안전 분리대로 뛰어들었어요." 그녀는 안쓰 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많이 다친 걸 보니 정말 마음이 괴롭군요."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겁니다." 경빈의 말이었다. "막 병원에 실려왔을 땐 목숨이나 건질 수 있을지 의 문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심했나요?' "사실은 모두 내 잘못이에요! 철규 형은 그날 본래 나 갈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나가자고 끌어서..." "시예 씨, 좀 앉아요." 철규가 웃는 얼굴로 자리를 권했 다. "우리 두 사람이 시예 씨 앞에서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요." 경빈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주스를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안색이 여전히 창백하고 피로해 보였다. "시예 씨." 그의 음성은 부드러 웠다. "안색이 좋지 않군요. 아직은 외출하면 안 돼요." 그녀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아 주 좋아요." "집에서 오는 길인가요?" "아니에요. 어머니와 함께 중앙병원에서 요양중인걸요. 그래서 삼 일 동안 신문을 보지 못했어요. 오늘에야 두 분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문 병 온 거예요." "그러면 몰래 온 것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어머니에게 말하고 왔어요. 어머니도 빨 리 가보라고 하셨어요. 대신 안부를 물으라고 하셨구요." 경빈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곽 사장님이 다녀가셨는데 마침 우리들이 자고 있어서 뵙지는 못 했어요. 시예 씨가 대신 감사의 말을 전해 주세요. 보내주신 많은 선물을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어?" 그 녀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걸요." "두 분의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그러셨나 보죠. 사모님은 충격을 받으실지도 모르잖아요."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두 분을 찾아올 거예요." 그녀가 진지한 눈빛 으로 말을 이었다. "내일 어머니가 퇴원하시면 아예 여기서 며칠 머물며 두 분을 간호하고 돌볼 준비를 하겠어요." 철규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시예 씨 같은 간호사는 사양할 겁니다." "전 진심에서 하 는 말이에요." 시예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경빈은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는 철규처럼 웃는 태도로 그녀를 대할 수가 없었다. "시예 씨의 호의는 충분히 받아들이겠어요. 그러나 여기까지 오려면 시예 씨도 번거로울 거고 곽 사장님과 사모님도 따님 혼자 여 기 와 있는 것이 마음 편치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황철규가 경빈의 말을 이어받았다. "여기 있는 간호사들도 시예 씨가 자기들의 직업을 뺏는다고 항의할 거예요." 그녀가 웃으며 일어나 철규의 침대로 다가갔다. "나는 황 선배의 낙천적인 성격이 좋아요. 완쾌되면 저랑 데이트하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거 죠?" 철규는 자기의 다리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제 오토바이를 탈 수 없어요." 잠시 울 적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대신 태워드리면 되잖아요." "좋아요." 철규가 싱글벙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천천히 병실 안을 둘러보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곧바로 재떨이 를 치우고 침대 위의 잡다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꽃병 속의 붉은 장미를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신에 자기가 가져온 글라디올러스와 강내 향으로 바꾸었다.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한 후에 원래 있던 장미를 다시 꽃병에 꽂았고 가져온 것과 색이 잘 조화되도록 배치했다. 철규와 경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정 리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막 꽃병에 꽃을 꽂을 때 철규는 무의식적으로 경빈 을 바라보았다. 경빈은 슬퍼서 철규의 눈길을 피했다. 경빈의 마음을 눈치챈 그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시예 씨는 붉은 장미를 좋아하지 않나요?" "너무 농염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두 분은 강한 색을 좋아하시나 보죠?" "나는 좋아해요." 철규가 계속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별로 좋 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엔 글라디올러스나 강내향 같은 꽃을 더 좋아하는 거 같네요." "그렇다 면 다행이네요." "언젠가 영화에 나온 대사가 기억나는 군요. '어떤 사람은 장미는 가시가 있어 좋아히 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가시가 있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상당히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 군요" 그녀가 감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아, 철학은 나에겐 너무 심오해요. 나는 그런 학문 따윈 연구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이 붉은 장미에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할 걸요?" 경빈은 다급하게 철규의 말을 끊었다. "형, 지금 무슨 얘기하는 것예요?" " 누가 보낸 것인데요?" 그녀가 관심을 보였 다. "내가 병원에서 산 꽃이지요." 철규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거 정말 미안하군요. 원래대 로 해놓겠어요." "아니에요. 시예 씨가 가져온 꽃이 더 좋아요. 경빈이는 처음부터 붉은 색을 싫어했어 요. 나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고요. 이렇게 바꿔 꽂으니 훨씬 보기 좋군요." "내일은 황 선배 취향 에 맞게 사오겠어요." "시예 씨." 경빈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매일 올 필요는 없어요. 시예 씨에겐 무리한 일이에요." 그녀가 경빈을 한번 쳐답보고는 서운한 듯이 말했다. "제가 정식 간호사가 아니라 고 쫒아내려는 거죠." "오해하지 말아요, 시예 씨.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두 사람이야 물론 대환영이지만, 이 병원 간호사들이 데모를 일이킬까 봐 그렇지요. 시예 씨가 여기 오려면 먼저 간호사들의 허락을 받아야 할걸요?" "농담 마세요!" 그녀가 은근히 철규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오자 병실에는 생기가 돌았다. 철규는 말이 더욱 많아졌고 종종 익살스러운 유머로 그녀가 배를 잡고 웃게 했다. 저녁이 되자 시예는 병실을 나섰다. "내일 다시 올게요.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아니에요, 고마워요." 경빈의 말이 끝나자 철규는 반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예 씨, 나는 일어날 수가 없으니 경빈이가 대신 시예 씨를 바래다 줄 거예요." 그녀는 경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일어났다. "제가 시예 씨를 모시지요."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경빈은 앞서 나가는 그녀를 따라나섰 다. 복도를 지나면서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영채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요. 하지만 억지로 될 일이 아니에요. 영채한테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할 권리가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은 너무 관대하세요. 하지만 이런 일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할 거예요." "벌써 잊어버렸어요. 물론 나도 고통스러웠지만요. 시예 씨, 전에 내가 영채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 기억 나요?" "네, 기억해요. 결국 그날 밤 선생님은 영채 때문에 만취해서 사고까지 나고..." "시예 씨." 경 빈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날 밤이 아니었어요. 병원에 입원한 뒤에 신 문을 보고 알았어요. 이번 사고는 영채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그녀의 얼굴엔 놀란 표정이 역력했 다. "그렇다면 우리 집을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일어난 사고라는 건가요?" "나는 대북으로 철규 형을 만나러 갔어요. 우리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술을 마셨죠. 그런 후에 오토바이로 중산북로를 지나다가 그만... 나는 철규 형이 안전 분리대로 오토바이를 돌릴 줄은 몰랐지요." "두 분은 주량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얼마나 마셨기에 그 지경이 되도록 모르셨어요?" "사실 나는 주량이 약한 편이에요. 그날 따라 저녁 우리 둘 다 마음이 몹시 울적했기 때문에 좀 많이 마셨죠." 그녀는 경빈에게 무슨 일 때문에 괴로 웠냐고 묻지 않았다. "선생님, 한 가지만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시예 씨, 뭐든 말씀해 보세요."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를 원망하죠?" "아, 왜 내가 시예 씨 아버지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날 아버지 가 선생님에게 한 얘기를 양금이 한테서 다 들었어요. 선생님이 집을 나갈 때 결코 기분이 유쾌해 보이 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절대로 곽 사장님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애초부터 일 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곽 사장님을 번거롭게 만들어 드렸어 요."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네 요. 아버지는 그날 선생님을 무례하게 대한 걸 후회하고 계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는 얘기를 우연 히 엿들었거든요." "철규 형과 나는 일이 정리되는 대로 곽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만 사고가 나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혼자만 알고 계셨 으면 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요." "좋아요." 경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아 버지는 일생일대의 곤경에 처했었대요. 그때 만인 구 원장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모든 사업 은 끝장날 뻔했대요." "아아!" 경빈은 흠칫 놀라며 덧붙여 물었다. "문제가 그렇게 심각했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들었던 대로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곽 사장은 부인에게 임진희의 일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뺀 모양이었다. 공장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단지 상대방이 홍콩 측의 투자 를 방해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다행히도 구 원장이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비로소 난관을 뚫고 안정을 찾았다는 정도의 간략한 설명이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얘기하고 몇 마디 더 덧붙였 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러셨어요. '상대방은 승부욕이 강해 다른 사람에게 재산을 빼앗기는 일만은 절대 참지 못할 사람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공장과 함께 죽을 것이다'라고요." 경빈은 온몸에 오한이 나 고 손에 식은 땀이 났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천광 열 때문에 생긴 일이라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만일 이 일이 잘못 처리되기라도 했다면 난 평생 고개를 못들고 살았을 겁니다." "경빈 씨가 미안해 할 건 없어요. 아빠 말로는 그들은 천광열이 없었으 며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일을 꾸몄을 거래요. 아빠는 이번 일을 거울 삼아 두 번 다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했어요. 이후에는 어떤 풍랑이 와도 끄덕없을 거라고요." 이 사건은 경빈의 마음을 끝내 고통스럽게 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 시예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하지만 난 선생님을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아빠와 엄마는 선생님이 나의 병을 낫게 해주셨다고 얼마나 고마워 하시는지 몰라요. 이젠 나도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결코 성민 씨를 원망하지 않 겠어요. 그러나 이후 다시는 그를 생각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화원 쪽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경빈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이 이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는 잠시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한 걸음으로 병 실로 돌아갔다. 철규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웃기는 일이라도 있어요?" "너는 왜 이 형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거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를 시예랑 함께 있게 만들어줬잖아." 철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시실 병원에서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무척 후회했다. 그날 술을 마시지 말았 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사고까지 당했어. 사실 넌 결코 영채를 잃은 것이 아니야. 네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형, 또 괜한 소리 하시는 군요!" "애정엔 비밀이 없는 법. 시예의 눈빛은 더욱 그렇단다. 너도 알다시피 눈은 영혼의 창이고, 사람의 마음은 눈을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나지." "형." 경빈은 다소 장난스런 표정으로 철규를 바라보았다. "후배에 대한 열정적인 분석 취미까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형한테도 두 가지의 작은 결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군요." 철규는 느긋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해 봐." "형은 참으로 총명한 사람이에요." "그래, 맞다. 나는 똑똑한 놈이야. 또?" "그리고 형은 사람들을 웃기기를 좋아해요." "그래? 그럼 한 가지 예를 들 어보지 그래." 경빈은 탁자의 꽃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그 꽃 얘기만 해도 그래요. 형은 분명히 붉은 장미는 영채가 보낸 꽃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시예 씨가 그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보려고 짓궂게 그런 거죠?" 철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경빈에게 말했다. "너는 애가 그렇게 우둔하다고 생각하니?" "그러면 날 긴장시킬 목적으로 그랬단 말이군요?" "대단하 군. 정말 오묘한 조화야. 강내의 향이 붉은 장미를 몰아내다니. 이건 정말 축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아닌가?" 경빈은 처량하게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형, 형의 그 기발한 총명함을 누가 감히 당하겠어 요. 요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해 봤는데 전 퇴원하면 바로 지방에 내려가서 마음 좀 정리하면서 유학고시 준비나 할까 해요. 몇 년 고생할 각오도 됐구요." "좀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니?" "사실은, 어제 해 군병원의 한 주임 의료관이 고옹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그는 신문에서 내가 부상을 입었다 는 기사를 읽고 위로도 할 겸해서 편지를 썼는데, 나한테 남부로 와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어요. 고 옹에 있는 진료소를 자기를 대신해서 내가 관리해 줬으면 좋겠대요.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일도 아니 고 아직 결정된 일도 아니지만." "너는 시예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려들고 싶지는 않아." "꼭 보석을 팔아 집 나갈 때 하는 말같이 들리는데." 황철규가 그의 말을 가 로막으며 말했다. "철규 형." 경빈은 철규의 말에 아랑곳없이 한마디했다. "그럼 형은 시예한테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섰지?" "마음이 변해서 그런 게 아니야. 아무리 명 장이라도 상대를 파악하지 못한 싸움은 위태로운 법이야. 패배할 걸 뻔히 알면서도 나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난 용사가 될 생각도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될 생각도 없어. 그래서 일찌감치 승산없는 전쟁 은 치르지 않는 게 낫다고 결정했지." "철규 형." 경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형은 정말 계산이 무척 빠르군요." "경빈아, 너한테도 이렇게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야. 난 너희들의 사랑이 성공할 수 있게 끔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말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난 이미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로 결심 했으니까요. 갑자기 남부의 청명한 기후가 그리워졌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경빈은 조 용히 창가로 걸어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다.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고 그는 오래도록 창가에 서서 한 곳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41 보름쯤 지나고 나서 경빈은 완쾌되었다. 깁스했던 좌측 허벅지가 일정기간 물리치료를 받아야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달리 불편한 구석은 없었다. 철규의 대퇴부는 아직 장기간 의 물리치료가 필요했다. 아직 목발을 짚고서야 겨우 몇 발자국씩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철규가 불구를 변하고, 반년 이내에 목발없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두 사람 은 동시에 입원하고 동시에 퇴원했다. 철규는 물리치료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담수의 병원으로 돌아가기 로 했다. 혼자서 이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퇴원 전에 경빈은 철규를 도와 짐을 챙겨 주었다. 철규 는 어딘지 우울해 보였으나 표면상으로는 평상시와 같이 웃고 떠들었다. "경빈아, 너 진짜 고옹으로 갈 거니?" "물론이죠. 며칠 전에 편지까지 보여 줬잖아요." "결심을 바꿔볼 생각은 없고?" "전혀요."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철규가 덧붙였다. "내 개인 욕심이지만, 난 네가 그렇게 먼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좋아서 가는 건 아니에요. 형은 모를 거예요. 사고가 났던 그날 밤 내가 곽 사장의 집에서 나왔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 한마디로 부평초 같은 신세였어요. 길 한복판에 서 목적지를 잃어버린 거야. 영채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이미 병원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비록 구 원장이 아무리 나에게 잘해줘도 난 병원의 동료들을 대하기가 창피스러워. 만약 형이 내 입장이 된다면 형도 마찬가지로 결심을 했으리라고 믿어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마 나도 너랑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야. 하지만 네가 떠나고 나면 내가 너무 적적할 것 같구나." "고옹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형 자주 올 거예요." "물론 그래야지. 나도 갈게." 철규의 표정은 점점 더 우울해졌 다. "솔직히 나도 일하는 환경을 바꿔볼 생각이야." "철규 형,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구 원장이 말씀하셨 는데, 형이 병원으로 돌아오면 요양기간 중에도 월급의 그대로 받게 해주신데요. 그리고 형 대퇴부가 어 떻게 되거나 상관없이 병원에 붙잡아두실 계획이던데요. 그는 형이 병원에서 꼭 필요한 의사라고 말했 어요. 뿐만 아니라 구 원장 자신에게도 형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나도 노인네와 얘기를 나눴 었어. 며칠 전에 네가 막 시예 씨를 데리고 나갔을 때 찾아오셨더군. 아주 관대하신 분이지. 오토바이 사고에 대해서는 한마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너와 영채가 만나기로 했던 일 을 이미 알고 계셨더군. 그는 이제 딸을 이해하고 있어." "사실 형은 영채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는 충 격을 받았잖아요." "그건 영채와 나, 둘 사이의 계산이지. 언젠가 청산할 기회가 있을 거야. 난 그런 일 로 노인네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어. 난 사육당하고 싶지 않다구." "형." 경빈은 마치 질책하는 태도였 다. "그건 형이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길어야 삼개월 후면 형도 완쾌될 거잖아요. 그리고 설령 다리가 불편하더라도 병원에는 형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아요. 그렇지 않아요?" 철규는 아무 대꾸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경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미연 씨가 형을 보러 자주 오잖아요. 미연 씨는 형 을 사랑해요. 형이 다른 일을 하겠다는 건 그녀를 실망시키는 일이에요." 철규는 또 한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경빈은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꽃병을 바라보았다. 꽃병 속에는 붉은 장미가 화려한 향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꽃은 아직 그곳에서 싱싱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이제 그녀들과 작별을 해야 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와서 경빈에게 전화가 왔다고 전해 주었다. 경빈은 그 간호사 뒤를 따라 원장의 거 실로 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화가 아니라 구 원장과 그 부인이었다. 경빈은 이상하다 고 생각했지만 곧 예의를 갖추었다. "우선 전화부터 받고 나서 다시 뵙겠습니다." 원장은 옆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면서 웃었다. "전화는 안 왔네. 우리가 여기서 얘기 좀 하고 싶어서 불렀어." 경빈은 구 원장이 권하는 소라에 앉았다. "오늘 퇴원한다면서요. 그래서 우리가 마중 나왔어요." 부인이 먼저 말 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저 혼자서도..." 구 원장은 담뱃재를 털며 그를 바라봤다. "철규가 그러는 데 퇴원 후 남부로 가서 살 예정이라고?" "그렇습니다." 경빈은 뜻밖의 표정을 지었으나 곧 사실을 털 어놓았다. "사실입니다. 어떤 친구가 절더러 와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군요." 구 원장은 한 동안 침 묵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네 심정을 잘 안다. 그리고 당연히 너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러나 만약 영채 때문이라면 일부러 먼 곳으로 갈 필요는 없다. 그 애는 길어야 한달 이내에 일본으로 떠나니 까. 내가 지난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영채를 너한테 시집보낼 수 없는 걸 제외하고는 우리 사 이에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우린 너를 우리 아들로 생각했었다." "시예 씨한테 곽 사장님 공장 얘 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원장님이 아니셨다면..." "아닙니다. 만약 천광열이 아니었다면 상대방은 일을 꾸 미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방법을 택했다면 적어도 제가 책임을 질 일은 없었겠지요." "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 어짜피 마찬가지 아닌가?" "적어도 저에게는 갖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신경 쓸 필요는 업네. 사실은 자네한테 한 가지 알려줄 게 있어." "네." 경빈은 진지하게 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 부부는 한동안 그를 그윽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구 원장이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 병원에 너를 만나러 왔을 때 네 외조모 이야기를 꺼낸 것을 기억하고 있니?" 경빈은 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전 할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단지 외할머니 성이 진씨였다는 걸 어머니에게 들은 것밖에는..." "나도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외할머니의 본래 성은 구씨였단다." "구씨요? 원장님과 같은..." "그래 동성일 뿐만 아니라 그분은 나의 큰 누님이시지." "아!" 경빈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 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 모든 거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란 걸 명심하고. 잘 모르 겠지만 난 무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부모도 일찍 돌아가셨고. 형제도 없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집 을 떠나 북경에서 공부했었지. 그후 일본에서 유학한 후 대만에 돌아와 의사가 되었단다. 내가 공부할 때 누이는 이미 동북으로 시집을 갔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단다. 내가 대만으로 돌아와 산 지 이십여 년쯤 되었을 때 대만은 광복되었고, 난 일본인 수중에 있던 병원을 접수했단다. 대륙이 함 락되자 누이도 곧 대만으로 도망쳐 왔어. 그러나 우린 줄곧 만나지 못했지. 우연한 기회에 소식을 듣고 내가 누이를 찾았을 때는 벌써 세상을 떠난 후였단다. 넌 고아가 아니라 내 큰 누이의 가장 아끼는 외 손자이자 나의 친척이지."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동안 구 원장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시 난 누이의 혈육을 찾아보았는데 두 아들이 있었어. 사실 누이한텐 미안한 일이지만 몇 번 도와주 고는 결국 그들과 관계를 끊었지. 가장 마지막에 찾아낸 게 너였는데, 공교롭게도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거야. 나는 곧 널 키울 결심을 했지. 누이가 남긴 혈육을 잘 키워 내 사업을 이을 후계자로 삼 을 욕심이었어. 내가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혹시라도 너한테 의타심이 생길까 염려되었기 대문이었단다. 난 영채를 너와 맺어주고 너희들이 결혼할 때 이 사실을 선포할 생각이었지. 그 애가 다 른 사람과 사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말을 마치자 구 원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빈은 그제서야 어렴풋이 나마 일말의 의혹이 풀리는 것 같았다. 왜 구 원장이 줄곧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았는지. 지금까지는 영채와의 관계 때문인 줄로만 알았지,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 다. 학교에는 뛰어난 학생들이 매우 많았고 그에 비해 조건이 좋은 학생도 많았는데 왜 구 원장이 자 신을 유독 총애했는지 전혀 몰랐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그는 문득 두 노인네가 많이 늙었 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 원장은 더욱 늙어 보였다. 두 내외는 무척 적적해 보였다. 영채의 갑작스런 결 혼이 더욱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위로의 말을 했다. "너무 상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채도 잘못 선택한 건 아니구요. 황 선생도 일본 화교 중에서는 명 망이 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니 행복하리라 믿어요. 나중에라도 제가 두 분께 효도를 다할 수 있는 기회 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녕 고옹에 가 있고 싶으면 그래도 좋다. 영채가 대만에 있을 때는 병원에 안 나와도 괜찮아. 그러나 그 애가 떠나는 대로 곧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난 이미 너를 대 신해 미국의 두 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해 놓았어. 금년 가을쯤엔 입학할 수 있을 게다. 그렇지만 네가 출 국할 때까진 집에서 함께 지냈으면 좋겠구나." "원장님." 늘상 부르던 호칭이 이제 와서 문득 어색해 진 경빈은 얼굴을 붉혔다. "이젠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상관없다." 구 원장은 훈훈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호칭은 네가 편한 대로 해라. 솔직히 너한테 할아버지 소리 듣기는 좀 이른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빨리 돌아와 두 분과 함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자를 받는 데 별 문제가 없을지 걱정입니다." "안심해라.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 구 원장 부인이 곁에 있다 가 한마디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될 일이 있단다. 네 한마디가 집안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이 얼마나 큰지 넌 알고 있어야 한다. 곽 사장은 시예를 너와 같이 미국으로 보내길 원할 거야. 나도 며 칠 전에야 이 얘기를 들었지만 이제 저도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그 댁 사람들과도 한가족처럼 지내야 한다." 경빈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다니! 이제 어떤 빛깔의 운명이 그를 기다릴 것인지 내심 설레이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때 구 원장이 온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얘긴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고, 지금은 가서 짐부터 챙겨 라. 장씨를 부를 테니 우선 황 선생을 좀 도와주도록 해라. 퇴원수속은 내가 이미 다 해놓았다. 오늘 점 심은 곽 사장 집에서 초대를 했으니 가서 먹도록 하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서둘러 끝내야 한다. 난 차에서 너희들을 기다릴 테니 황 선생을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경빈은 대답을 마치 자 바로 병실로 돌아갔다. 복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속으로는 여러 가지 희비가 교차되는 것을 느꼈다. 이젠 모든 게 마지막이다 싶은 순간에 이렇듯 모든 게 새로 시작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에겐 새로운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꿈이 아닐까? 모든 게 꿈이 아닌 현실임은 분명했다. 단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었다. 구 원장의 그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무엇보다도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 었다. 만약 자신이 구 원장과 혈연관계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적지 않게 의존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 고, 그렇게 되면 모든 일에 열심히 노력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얼마간의 게으 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병실에 돌아왔을 때 철규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러나 경빈의 표정이 여느 때와 다른 걸 눈치채고는 놀라운 듯 물었다. "대체 누구한테서 온 전화길래 이렇게 늦었 냐?" "아." 순간적으로 경빈은 방금 전의 일을 철규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구 원장이 적당한 시기를 보아 선포 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는 그럴듯한 핑계를 둘러댔다. " 구 원장이 왔어요. 그 노인네가 고맙 게도 직접 퇴원 수속까지 밟아 주었어요." "수속밟을 때 별 문제 없었어?" "괜찮던데요. 곧 장씨가 와 서 우리 짐을 옮겨줄 거니까 우린 그냥 나가기만 하면 돼요." "혹시 신문기자가 내 사진을 찍겠다고 오 지 않을까?" 철규는 실망했다는 듯이 익살을 떨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우릴 점심 식사에 초대 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 노인네?" "노인네도 손님인걸요. 곽 사장이 초대했어요." 철규는 꽃병 속 에 꽃을 바라보다가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꼭 너랑 나랑 도박하는 거 같구나. 아마 저 꽃을 임자는 절 멀리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걸." "형이 졌어요." 경빈은 자신 있게 말했다. "방금 구 원장께서도 내가 고옹에 간다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셨어.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가서 물어 봐요." 장씨가 간호사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경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다시 봅시다. 우리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장씨와 경빈은 철규를 부축하고 간호사가 그들의 짐을 들었다. 네 사람은 함께 천천히 걸어 나갔다. 텅빈 병실에는 화병 속의 붉은 장미와 강내향이 분분한 향기를 내뿜으며 미풍에 가볍게 나풀 거렸다. 잠시 후 체온계를 수거하러 다시 방으로 들어온 간호사가 이 신선한 꽃들을 가져다 사무실에 있는 화병에 꽃았다. 밖에서는 경빈이 철규를 부축하며 화원을 지나고 있었다. 정원에는 각양각색의 꽃 들이 피어 있었다. 이제 그러한 꽃들은 그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별 관심없이 지나쳤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찬란한 태양 혹은 깨끗한 복도와 흙의 냄새, 꽃과 나무들 사이에 새 울음 소리도 하나같이 그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그 들의 청춘과 열정을 바꿔 이룩할 그들의 찬란한 미래뿐이었다. 끝...